
♧ 바다라는 질량
작은 목선 한 척
빌레 위로 끌어올려져
무덤이 되었네
거대한 물고기 같은 빈 배,
소금꽃 피우며
삐걱거렸다
바다만 바라보던 아버지
오름자락 무덤 한 채에 앉아서도
반달이 뜨면
먼 길을 오시겠지
바다 소식을 묻듯
배를 살피는 동안
사소한 일에도 목이 메고
등대 불빛 따라 시선을 돌리시겠지
그날 이후
바다 쪽으로만 내려앉으셨겠지
만조와 영등바람을 기다리며
아니, 내가 섬을 떠나길 기다렸던 걸까
배는 이미 바닷속으로 사라졌네
아버지와 배,
검푸른 어둠 속 파도가 되어 떠났겠지
나는 계절이 바뀌어도 여전히 생선을 굽고,
바다가 밀려오는 소리를 듣겠지

♧ 수평선으로 밑줄 그은
바다가 놀자, 라고 부르는 여름이에요
대문 없는 골목 사이, 숨바꼭질하던 아이들이 목줄 풀린 강아지들처럼 백사장으로 달려 나와요 옷을 입은 채 바닷속으로 뛰어들 때마다, 수면 위로 튀어 오르는 숭어처럼 웃음소리가 반짝여요
아주 길게 흐른 여름이에요
바닷가 아이들은 헤엄치는 법을 따로 배우지 않아요 물장구치다 몸이 물 위로 떠오르면 바다의 허리춤을 잡고 개헤엄으로 파랑의 높낮이를 재지요 한두 번 바닥의 깊이가 제 키를 넘어서면, 더 멀리 나아가기는 쉬워요 파도를 쫓아가거나 지느러미를 흔들며 놀려 대는 물고기를 따라가기도 하지요 도리어 파도에 잡히거나 허탕 친 손을 내밀 때마다 뭉게구름이 커져 가요
헤엄치는 것도 심심해진 아이들은 바위틈에서 먹보말을 잡아요 물속에서 숨을 참아 낼 때마다 소금꽃을 피워 내는 현무암 검은 빌레, 내팽개친 슬리퍼들을 떠안은 채 물먹은 몸으로 파랗게 돌아올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지요
자벌레만큼도 나아가지 못한, 열두 살 여름이에요
물속에서 음흉한 남자아이들의 시선과 마주쳤어요 마치 몸이 작살에 겨냥당한 느낌이었죠 투명한 빛이 깨지는 소리를 들은 순간, 바다와 겹겹의 파도 사이에서 출렁이던 내가 멀리 떠나 버렸어요 가릴 수 없는 낮과 들키고 싶지 않은 밤의 차이를 눈치챈 순간이었죠
한 줄 외로움을 버틴 여름이에요
더 이상 파랗지 않은 여름도 멀어졌어요 햇볕에 탔던 피부가 벗겨질 때쯤 비늘을 벗어던지는 꿈을 꾸었어요 그 새벽, 커튼을 걷어 내듯 수평선을 끌어당기며 지나간 배 한 척, 바다의 박동을 들으며 이유 없이 마음이 놓였지요
퇴색된 밑줄에도 불빛이 스며드는 여름이에요
우연히 찾아낸 여름에 기대 마음이 펄떡입니다 바다까지 가지 않아도 모래 위에 또 한 아이가 수평선을 그리는 동안 하늘과 바다 사이, 여름은 끝나지 않아요

♧ 흔들리는 끝
불치의 담도암을 앓으며
치매의 숲까지 걸어 들어간 당신
결국 요양 병원 병상에 옮겨진 당신을
나는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얼굴은 얼어붙은 연꽃처럼 고요했고
병실 안은 숨조차 멎은 듯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 변화마저 잠잠히 받아들이던 당신
돌아서는 내 등에서 무엇을 알아챘을까
뒤가 갑자기 소란스러워 돌아본 그 순간,
한쪽 슬리퍼가 벗겨진 채 달려 나온 당신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은 손이 떨리고
노랗게 물든 눈빛이 매달렸다
“나, 제발 버리지 마라."
눈물이 끝없이 심연 속으로 흘러내렸다
“나, 제발 같이 데려가 달라."
허우적대는 몸에서 부딪치는 쇳소리
영혼이 부서지는 듯 아득하게 울렸다
발끝이 공중에 떠 있는 듯
내 뜻과 달리 굳어 버린 몸은
어디에도 닿지 않았다
나는 결국 도망치고 말았다
무력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끝없이 흔들렸다
저 아래, 바닥없는 어둠 속에 서 있는 당신처럼

♧ 봄을 밀어내며
제 몸을 모두 내어 주는
가난한 제주 섬의 신들처럼
어머니,
힘에 부친다는 말조차 아껴 가며
밭과 바다를 오가며
푸른 영혼을 닮아 가셨다
평생 집을 지키는 등불처럼
곁을 비운 날이 드물었던 당신
끝내 거부하시던 요양원
자식들의 눈물 앞에서는
고집을 접으셨다
그러나 집을 떠나자마자
길 위, 돌아볼 틈 없이 쓰러진 당신
구조대 손길은 닿지 못했고
바람만이 흔들었다
끝내 요양원에 가지 않겠다는
뜻인 듯
아무 말도 없이
떠나신 당신
사람들은
당신의 죽음조차 복받은 삶이라 말할 뿐
아무도 모르게 수북이 쌓인
돌멩이들을 묵묵히 견딘
당신의 날들은 보지 못했다
어머니가 떠나자
집은 빛을 잃었고
이 년째 집으로 걸음을 떼지 못하는 나는
어머니 없는 봄
기다리는 이 없는 봄
오늘도 밀어내고 있다

♧ 겨울나무
법당에 혼자 앉아 있었다
스님이 들어와 염불 없이 호통쳤다
“너, 누구냐?"
주위를 둘러봐도 아무도 없었다
고요 속에서 꿇은 무릎이 풀리더니
나는 법당 한가운데서 탑 돌듯 돌기 시작했다
허리가 굽은 채
시든 목련 꽃잎 위를 더듬듯 걸었다
스님의 목소리가 바람처럼 스며들었다
“너, 누구냐?”
오히려 내가 묻고 싶었지만
목소리는 끝내 열리지 않았다
스님이 또 물었다
낯설고 깊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쪽찐 흰머리,
허름한 무명 치마저고리를 입었소.”
“왜 여기 왔어?"
거칠게 따지는 스님에게 나도 모르게 대답하고 있었다
“잃어버린 자식을 찾아 헤매고 있소.”
스님의 질문이 다시 울릴 때마다
다른 생이 내 몸을 통해 흘러나왔다
갑자기 허공이 갈라지고
주저앉은 등허리에 죽비가 떨어졌다
파문 속,
겨울나무만 고요히 서 있었다
*홍경희 시집 『울었던 자리마다 돌을 쌓으며』 (걷는사람, 2025)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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