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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김혜연 시집 '근처에 살아요'의 시(5)

by 김창집1 2023. 12. 13.

 

 

그 방

 

 

숨을 오래 참아 빨간 눈

네 하얀 팔꿈치에서

피어오를 것만 같은 진심

취해 잠들면 다음다음의 안녕

철저하게 꿈을 소화하던 벽

알고 싶지 않은 이국의 방언들이

참던 숨처럼 흘러나와 발목을 감싸던 복도

가짜를 달래느라 진짜를 놓치는 피사체들

굶주린 파충류

죽은 연기로 뱃속을 채우던

누런 동전처럼 반짝이던 눈동자들

아무도 모르는

우리가 소각된 그 방의 기록

 

 

 

 

갈칫국을 끓이는 저녁

 

 

갈치는 사람도 삼킨데

뽀얀 국물에 비린 작별이 흐른다

 

할머니의 앙상한 손이

갈치 도막을 덜어 소녀의 그릇에 놓는다

평생 갈치를 다듬던 손으로

평생 갈치처럼 무엇이든 삼키던 모정으로

 

병풍 뒤 흰 할머니에게

수명을 도막도막 덜어주고 싶은 소녀가

제 살만 꼬집으며 운다

 

뽀얀 팔에 피멍이 번지고

미움에 골몰한 어깨에

흰 나비가 날아와 앉는다

 

상여가 지나간 새벽 골목의 냄새가

은빛 갈치처럼

흰 나비처럼

소녀의 긴 여백이 된다

 

늦여름,

뽀얀 국물이

버릇 같은 저녁을 삼킨다

 

 

 

 

반대편의 식탁

 

 

남은 건 빈번했던 표정

 

죽음이 미리 당신을 덜어내고

삶이 증명을 포기했어도

당연한 죽음은 없다는 걸

씹고 삼킬 때 깨달았지

 

살아남은 자가 졌으니

나의 목구멍은

그대에 대한 징벌

 

병원 밥을 겨우 삼키고

모로 누운 당신 곁에서

편의점 도시락을 우물거리던

나의 그릇된 안색

 

향을 피우고

당신을 쏟아낸 자리엔

멀건 고백들

 

목구멍에 돋아난 죄책감이

지박령처럼 간질이는 식탁

 

마주 앉은 당신은

뒷면의 표정으로

 

나는

닿지 못할 고백으로

 

 

 

 

세이렌

    -뱀의 발성

 

 

  그림자를 삼킨다

  그림자가 목소리로 만들어졌다는 걸 말해줄 수 없다

 

  목구멍을 모범적 표정들이 막는다

  나의 발성법은 똬리, 를 틀 수 없다

 

  종을 묻는다면

  그림자를 뱉을까 똬리를 틀까

 

  내 노래를 들어줘 멋대로 흘러드는 네 운명을 뱉게 해줘 모든 것의 시작인 귀들을 핥게 해줘 뜨거워지는 네 혈관에 파고들 수 있게 해줘 왜곡하는 눈동자를 삼키게 해줘 돛대에 묶인 너를 풀어줘

 

  예감한 당신이 나를 힐끔거린다

  빈칸에 대다수의 분위기를 채우시오

 

  뱀이냐 묻기 전에

  귀신이냐 묻기 전에

 

  바벨탑 근처는 가 본 적도 없습니다

  사과는 도대체 어떻게 따는 겁니까

 

  미쳐 날뛰며 바다로 뛰어들어줘 검은 입속에서 후회로 팔딱거릴 비명에 맞춰 발톱이 부서지도록 춤을 추게 해줘 왼손에 사과를 쥐고 모든 날을 깨물게 해줘 쓸데없이 길게 존재하지 않게 해줘 부리가 부러지고 머리가 으깨어 죽게 해줘 묻지 말고 내 노래를 들어줘

 

  말이 죽었는데 목만 남는 건 억울하다

  억울은 모두에게 어울린다

 

  문을 닫고 접경이 되고

  흘러드는 그림자를 조금씩 모아둔다

 

  누구냐 묻기 전에

  무간無間에서 말라가기 전에

 

 

 

 

밤의 도마

 

 

  배가 불러와요 고래를 삼킨 탓인지 칼을 삼킨 탓인지 두 발이 보이지 않아 둥둥 떠다녀요 죽어가는 것들의 악취가 피어나요 갓 빠져나온 영혼들은 늙은 아기가 되어 새벽의 골목을 기어 다녀요 밤은 촉촉하고 아무렇지 않게 풀냄새를 풍겨요 죽음이 껍질을 벗는 동안엔 누구라도 너그러워져요 노란 불빛 아래 쌓여가는 것들에서 핏물이 흐르고 노란 냄비에선 보글보글 몸 없는 대가리들이 익어가요 노랑은 따뜻하고 칼은 서러운 것들을 베고 나는 배가 불러와요 쌓인 눈알들이 마지막으로 바라본 것은 불빛이었을까요 나였을까요 나는 배가 불러와요 배를 도마에 붙이고 두근거리는 심장의 너울을 견디며 칼을 휘둘러요 사람들은 똑같은 말을 반복해요 새로운 말이 생기면 깔깔대며 그 말이 죽을 때까지 그 말만 해대요 다리가 부풀고 손가락이 부풀고 죽은 말들이 둥둥 떠다녀요 못 박힌 나무판자 위해서 꿈틀대는 것들의 배를 가르자 고래들이 쏟아져요 나는 눈알들이 마지막으로 바라본 것을 불러보고 싶어요 깊은 바다의 노랫소리가 들려요 모든 말이 죽어버린 나는 머리만 남겨져요

 

 

                     *김혜연 시집 근처에 살아요(애지, 2023)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