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내 발, 네 발 – 김정선
아스팔트 위를 스치는 검은 바퀴
휘발유 입김 내뿜으며
속도를 삼키는 강철의 야수
이에 질세라 네 발을 굳게 박고
대지의 박동을 타고 나는 망아지
띠그덕- 띠그덕-
시간을 밟고 달린다
쇳덩이 등에 올라탄 네가 부럽다
바람을 가르고 내달리는 네가 부럽다
쇳덩이 위에서 흔들리는 네가 부럽다
살아 있는 생명을 타고 뛰노는 네가 부럽다
엇갈린 선망
뒤섞인 욕망
질주하는 두 세상은 서로를 닮았다

♧ 시나 한 수 – 김진율
임보다 꽃을 먼저 생각한다 하면
사랑을 아직 모른다 할 거고
꽃보다 임을 먼저 생각한다 하면
아픔을 아직 모른다 할 거고
달빛보다 별빛이 곱다 하자니
달은 뜨지 않을 것 같아
바람에 몸을 맡긴
연끈 같은 이내 인생
숙명의 코뚜레에
꿰여진 팔자려니
빗물로 별을 그려
시나 한 수 지을 밖에

♧ 고립 – 송창권
수많은 사람들에게도
숱한 바람 따라 머무른 그곳
네모난 절벽에 떨어지고 만다
불빛만 화려해진 세상
정작
고요라는 추상은
저 몸짓에 지워져 가는가
여기
좁다란 땅에 발 디딜 틈조차 보이지 않는 세상
스스로 탈출을 시도하지만
콘크리트 벽으로
창살로
아!
동트는 새벽 미명이라도
만질 수 있으려나
보기만 해도
볼 수만이라도 있으려나.
세상 속에 푹 빠져
나오지 못하는 각진 영혼이여
시나브로 작아지고 있다
버려지고 있다
저 네모 속에 몸부림치는 고적,
무덤 속의 침묵!

♧ 주머니 속 운율 - 양순진
눈 대신 쓸쓸함이 내리는 골목 걸으며 더는 다가설 수 없는 한 사람의 근황
주머니에서 만지작거린다
몇 아이들 베스킨라빈스 박스 하나씩 손에 든 채 지나가고 연인들은 어깨동무에 훈훈함
감싸안고 지나치는데 나는 먼 나라의 기억과 조잘거리며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 무렵을
밥처럼 깨무는 중이다
얼마나 고단했으면 주머니에서 꺼내지 못해 소용돌이처럼 휘말리는 감정 하나에 전 생애 저당 잡혀버렸는지 산새처럼
지나온 시간에게 매달리는지 그 어떤 결속도 던져주지 않는 곁이란 슬픈 것
눈 대신 쓸쓸함이 내리는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마다 당신은 주머니에서 번지는 운율로 흐르겠지만 나는 알지 더는 그 곁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는 것을 쓸쓸함 대신 쏟아지는 눈의 나라로 건너가야 한다는 것을
방금 내 손바닥을 벗어나는 새는 가장 푸른 하늘로 날아간다 슬픔을 낳을 수 없는 시간이 페이지를 넘기는 것처럼

♧ 당신의 서랍 – 현경희
그대가 만들어준 서랍에 채울 무언가를
생각하고 또 생각해보았죠.
무척이나 많을 것 같았는데 역시나였습니다.
단 하나밖에 없었지요.
'아직은'
오직 그대만이 있어야겠습니다.
꽁꽁 숨겨서 보고 싶을 때마다 열어보고 싶은 사람.
달아나지 않게 꽁꽁 가둬두어야 할 사람.
그러라고 서랍을 내게 준 것이겠죠
참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내 마음을 훔친 것도 모자라 이젠 시도 때도 없이
열어보라고 서랍까지 주었으니까요
오늘은 그 서랍 안을 청소하고 곱게 쓴
하얀 손편지를 넣어두겠습니다.
내일은 무엇이 그 안을 채울지 우린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둘이 함께 만든 기억이 나쁘지 않을 거란 확신입니다.
꿈속에서 당신의 웃는 얼굴을 봅니다.
더 자주 보고 싶습니다.
그 웃음에 내가 있기를
소망하면서……!
*대정현문학회 간 『대정현문학』 (2025. 통권 제10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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