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대정현문학' 2025년 제10호의 시(2)

by 김창집1 2026. 3. 28.

 

♧ 내 발, 네 발 – 김정선

 

아스팔트 위를 스치는 검은 바퀴

휘발유 입김 내뿜으며

속도를 삼키는 강철의 야수

 

이에 질세라 네 발을 굳게 박고

대지의 박동을 타고 나는 망아지

띠그덕- 띠그덕-

시간을 밟고 달린다

 

쇳덩이 등에 올라탄 네가 부럽다

바람을 가르고 내달리는 네가 부럽다

 

쇳덩이 위에서 흔들리는 네가 부럽다

살아 있는 생명을 타고 뛰노는 네가 부럽다

 

엇갈린 선망

뒤섞인 욕망

질주하는 두 세상은 서로를 닮았다

 

 

 

♧ 시나 한 수 – 김진율

 

임보다 꽃을 먼저 생각한다 하면

사랑을 아직 모른다 할 거고

꽃보다 임을 먼저 생각한다 하면

아픔을 아직 모른다 할 거고

달빛보다 별빛이 곱다 하자니

달은 뜨지 않을 것 같아

 

바람에 몸을 맡긴

연끈 같은 이내 인생

 

숙명의 코뚜레에

꿰여진 팔자려니

 

빗물로 별을 그려

시나 한 수 지을 밖에

 

 

 

♧ 고립 – 송창권

 

수많은 사람들에게도

숱한 바람 따라 머무른 그곳

네모난 절벽에 떨어지고 만다

 

불빛만 화려해진 세상

정작

고요라는 추상은

저 몸짓에 지워져 가는가

 

여기

좁다란 땅에 발 디딜 틈조차 보이지 않는 세상

스스로 탈출을 시도하지만

콘크리트 벽으로

창살로

아!

 

동트는 새벽 미명이라도

만질 수 있으려나

보기만 해도

볼 수만이라도 있으려나.

 

세상 속에 푹 빠져

나오지 못하는 각진 영혼이여

시나브로 작아지고 있다

버려지고 있다

저 네모 속에 몸부림치는 고적,

무덤 속의 침묵!

 

 

 

♧ 주머니 속 운율 - 양순진

 

눈 대신 쓸쓸함이 내리는 골목 걸으며 더는 다가설 수 없는 한 사람의 근황

주머니에서 만지작거린다

 

몇 아이들 베스킨라빈스 박스 하나씩 손에 든 채 지나가고 연인들은 어깨동무에 훈훈함

감싸안고 지나치는데 나는 먼 나라의 기억과 조잘거리며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 무렵을

밥처럼 깨무는 중이다

 

얼마나 고단했으면 주머니에서 꺼내지 못해 소용돌이처럼 휘말리는 감정 하나에 전 생애 저당 잡혀버렸는지 산새처럼

지나온 시간에게 매달리는지 그 어떤 결속도 던져주지 않는 곁이란 슬픈 것

 

눈 대신 쓸쓸함이 내리는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마다 당신은 주머니에서 번지는 운율로 흐르겠지만 나는 알지 더는 그 곁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는 것을 쓸쓸함 대신 쏟아지는 눈의 나라로 건너가야 한다는 것을

 

방금 내 손바닥을 벗어나는 새는 가장 푸른 하늘로 날아간다 슬픔을 낳을 수 없는 시간이 페이지를 넘기는 것처럼

 

 

 

♧ 당신의 서랍 – 현경희

 

그대가 만들어준 서랍에 채울 무언가를

생각하고 또 생각해보았죠.

무척이나 많을 것 같았는데 역시나였습니다.

단 하나밖에 없었지요.

'아직은'

오직 그대만이 있어야겠습니다.

꽁꽁 숨겨서 보고 싶을 때마다 열어보고 싶은 사람.

달아나지 않게 꽁꽁 가둬두어야 할 사람.

그러라고 서랍을 내게 준 것이겠죠

참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내 마음을 훔친 것도 모자라 이젠 시도 때도 없이

열어보라고 서랍까지 주었으니까요

오늘은 그 서랍 안을 청소하고 곱게 쓴

하얀 손편지를 넣어두겠습니다.

내일은 무엇이 그 안을 채울지 우린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둘이 함께 만든 기억이 나쁘지 않을 거란 확신입니다.

꿈속에서 당신의 웃는 얼굴을 봅니다.

 

더 자주 보고 싶습니다.

그 웃음에 내가 있기를

소망하면서……!

 

 

                 *대정현문학회 간 『대정현문학』 (2025. 통권 제10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