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비아그라 – 김중일
아 아
총에 맞은 듯
혼자 외마디 소리를 지른 후
옷을 입는다
아내가 자린 아침 식탁
불만 가득한 얼굴엔
다음부터 네가 차려 먹어라 써있다
돌밥보다 더 딱딱한 쇠밥
종일 이곳 저곳 차이다
새벽 미안함에
외식하려 전화하니
꺼져있다는 친절한 안내
널브러진 방안
미처 가져가지 못한
꽃무늬 치마와
물방울 블라우스
밤일이 너무 안 맞아 법원에서 봐
낯익은 글씨
손에 쥐었던 비아그라
방바닥에 흩어진다

♧ 사랑하기 좋은 날 – 박구미
신발장 맨 위 간에
아끼던 구두를 꺼내 신어 보는데
뒷굽이 덜렁거린다
오래 그냥 둔 탓에
발자국 하나 찍어보지 못한 구두
까만 부스러기가 바스러져
티격태격했던 그 일로
며칠째 눈길조차 주지 않고
먼저 꺼내지 못한 말처럼
바닥에 굴러다닌다
오래 그냥 둬서 미안했다
말 한 마디 못한 채
신발장을 털고 쓸고 닦는다
구두 수선 맡기고
저녁엔
막창에 소주 한 잔 하자고 해야겠다

♧ 혼사 – 박태근
어쩌면
너의 어머니께서
태곳적부터 잉태해 계시다
오늘날에 너를 낳으셨고
태곳적부터 작명해 놓은 너 이름
아들아 내 부르니
우렁차게 응애 대답하더만
어느 사이 혼기가 꽉 차
규수 모셔 혼사 치르니
오늘과 같이 경사스러운 날이 있구나
내 며느리야
내 아들아
고맙다
양가 부모님 일가친척 잘 섬기고
보통 사람들처럼 아들딸 낳아
오대양 육대주에 양가 모친께서 촛불 밝혀 주셨으니
내외가 소통이 잘 된 행복한 둥지 꾸리거라
사둔 어르신 어찌 보면
우리는 태곳적부터 맺어질 인연
축하하려 왕림하신 일가친척 내빈 앞에서
애써 키워 사돈 맺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축복 주시려 왕림하신 일가친척 내빈께도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 까짓 것 – 송준규
포항문화원에서 유명 시인
특강 있다 해서 가법게
버스 타고 참석했다
시집 한 권 사서 친필 사인 받고
시인의 강연은 듣는 등 마는 등
단체 사진 인증샷 남기고
설 머리 청춘 통닭 이층 난간에 앉아
비 그친 영일대 밤바다가 쓰는 시
치맥으로 받아 적다가
늦은 밤 막차에 오르니
웬일, 아무도 없다
이 큰 차 혼자 타고 밤을 가르며
논스톱으로 달려갔다
스물다섯 정류장
소티재 넘고 포항역 지나
포레나 집 앞까지
누구는 기다란 열차 끌고
압록강 건너 단둥 거처 북경까지
무게 잡고 갔다는데
나는,
밤하늘의 달과 별들을
수행단으로 거느리고

♧ 바람의 말 – 여연
진실을 말하자면
제 말은 사실입니다
정말입니다
믿어 주세요
말 뒤에 의심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입에 붙은 주문처럼 되뇌는 사이
말들은 스스로 흔들린다
어떤 때는 수식을 뺀 담백한 말이
더 진실할 때가 있다
말에 군더더기가 붙을수록
바람에 날릴까
발밑이 허전하다
*월간 『우리詩』 3월호(통권453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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