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잠깐이라는 산책 – 김진숙
하루의 시간을 오려
하늘 한번 보는 일
당신이 재촉하는 겨울 문턱을 넘다가
잠깐은 어디까진가 멈추고 선 날이다
기차를 기다릴 때
밥물이 끓고 있을 때
아직 지우지 못한 전화번호를 누를 때
사라진 간이역처럼
먼 데서 오는 것들*
한눈팔기 좋아하고 제멋대로 꿈을 꾼다
돌아와 생각하면 놓치는 일이 태반인
아무도 붙들 수 없는 그곳으로 가보는 일
모니터에 박혀 있는 눈동자는 두고 간다
누군가 다녀가는 잠깐이라는 산책에선
마지막 뜸을 들이는 일
그마저도 소름이다
---
*홍임정 소설집 제목에서 차용.

♧ 인연 - 문태후
처음
찾아오는
인생길에서
인연인 듯
연인인 듯
같은 시간 속에
있음으로 하여
없음으로 하여 삶이 흔들린다
인연이었을까
연인이었을까
다른 공간 속에서
옴으로 하여
감으로 하여 세상이 움직인다
인연이었으면 꽃처럼
연인이었으면 꽃향기처럼

♧ 맨 인 더 블랙 레인 – 서상민
사내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검은 우산에 검은 중절모를 쓴 사내들이었다 검은 슈트에 검은 구두를
신은 사내들이었다 흰 와이셔츠에 붉은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붉은 넥타이는 도드라져 보였고 난
그게 생경하고 괴이하다 생각했다
시계방향으로 돌면서 쏟아지고 있었다 간혹 시계 반대 방향으로 쏟아지는 사내들도 있었다 보통
크기의 사내들이었지만 턱없이 작거나 거대한 사내들도 있었다 같은 속도로 내려왔지만 느리거나
빠르게 내려오는 사내도 있었다 어지러웠고 심한 구토감을 느꼈다
아스팔트에 부딪쳐 깨지고 있었다 우산이 중절모가 슈트와 신발이 흩어지고 흰 셔츠는 시들어 떨
어진 아몬드꽃처럼 지저분했다 붉은 넥타이가 혀를 날름거리며 하수구로 스며들었다
부서졌던 사내들이 뭉쳐지고 있었다 찢긴 우산과 찌그러진 중절모와 슈트와 빛 잃은 구두들이 모여
들었다 흰 셔츠는 검게 변했고 붉은 넥타이는 빗물에 젖어 축축했다
솟구치고 있었다 일그러진 얼굴의 사내들이었다 쏟아진 사내들과 솟구친 사내들이 같은 사내들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이 끝 없는 반복이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었으므로 나는 그게 슬펐다

*마티즈
♧ 사는 일이란 – 신희자
오늘은 몸도 마음도 처진 저녁
책을 보며 마음을 다스리는데
하루살이 한 마리 책속으로 날아든다
무의식적으로 책을 덮었다
아차 싶어 펼치는 순간 하루살이는
정신을 못 차리고 바둥거리다
하루가 다 지났다
하루를 살다
나의 책 속에서 생을 다한
그이 몸을 손으로 만지려 하는데
그만 먼지가 되어
사라지고 말았다
먼지에서 왔으니
먼지로 돌아간 하루

♧ 봄, 가시리加時里*의 대화 – 양민숙
봄이 가시리를 스치면
먼저 피어나는 것은 바람입니다
노란 숨결이 따뜻해지고
들판 가득 유채꽃이 일어나면
비로소 당신을 초대합니다
말 한마디 하지 않아도
온 마을이 환해지는 날들
풍경이 말을 걸어오면
무리 지어 대답하는 사람들
닮은 구석 하나 없이 제각각
다른 생각으로 살아가는 우리도
유채꽃 군락처럼
나란히 줄 맞추며
손잡을 수 있을까요?
오늘의 문장과 장면이
당신 곁을 바람처럼 흐른다면
봄에는 가시리에서 만나요
시간과 시간이 더해져
서로의 문장이 닿는 자리에서
우리, 완성된 시詩로 만나요
---
*제주도 표선면에 위치한 마을로 봄이면 유채꽃 잔치를 한다.
*한수풀문학회 간 『한수풀문학』 2025년 제20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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