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꽃
좋아한다 눈짓 한번 준 적 없는데
나 혼자 반해서 난리를 치다니
사랑한다 한 마디 말도 없는데
나 혼자만 미쳐서 안달하다니
가까이서 보라고?
멀리서 바라보라고?
적당한 거리를 두라고?
한겨울 밤이 깊이 막막해지면
이제 별꽃이나 따자, 이별꽃
마음 없는 말이라도 한마디 할까, 아니네!

♧ 나는 날마다 무덤을 짓는다
해가 지면
문을 닫고 하루를 접는다
하루는 또 하나의 종점
나는 하나의 무덤을 짓는다
문 연 채 죽는 것이 싫어
저녁이면 대문부터 창문까지 닫고
다 걸어 잠근 고립무원의
지상낙원을 만드노니
둘이 살다, 셋, 넷, 다섯,
이제는 다들 떠나가고
나만 혼자, 홀로, 살다 보니
집이 천국의 무덤이 되었다.

♧ 고독사 1
남의 일이 아니다
내일 일 아닌 내 일이구나
내 나이 몇이라고?
벌써 팔십이 넘었다고!
부드럽게 말해도
너무 팔팔하고 쌘 발음이 영 안 좋네
팔아먹을 게 남아 있긴 한 것인가
살 수는 있는가, 뭐로 뭘 사겠는가
그럼 죽는 것인가
난감하네 난감하네
독 오른 고추 몇 개 따다
날된장 찍어 술안주나 하자!

♧ 나는 무엇인가?
건강보험료 납부 증명서를 떼어 보니
“해당 없음”이라고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이 증명합니다
납세증명서를 떼어 봐도
“해당 없음”이라고
도봉세무서장이 밝히고
이어 지방세 납세증명서를 떼어 봐도
“해당 없음”이라고
서울특별시 강북구청장이 증명해 줍니다
나는 대한국민이긴 한 것인가
이러고도
내가 대한민국 국민이 맞는가
국민 여러분 미안합니다
내가 그간 칡처럼 등나무처럼,
담쟁이덩굴처럼 살았나 봅니다
이제 칡과 등처럼 갈등하지 않고
차탈피탈 핑계 대지 않겠사오니
해량하시기 바랍니다.

♧ 세란헌洗蘭軒 • 2
물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으로
난잎을 씻고
내 마음을 닦노니,
한 잎 한 잎 곧추서고
휘어져 내려 허공을 잡네
바람이 오지 않아도
춤을 짓고,
푸른 독경으로 가득 차는
하루 또 하루
무등, 무등 좋은 날!
*홍해리 시집 『네가 찾아온 날 나는 내게 없었다』 (놀북, 2025)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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