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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홍해리 시집 '네가 찾아온 날 나는 내게 없었다'(7)

by 김창집1 2026. 4. 6.

 

♧ 꽃

 

좋아한다 눈짓 한번 준 적 없는데

나 혼자 반해서 난리를 치다니

 

사랑한다 한 마디 말도 없는데

나 혼자만 미쳐서 안달하다니

 

가까이서 보라고?

멀리서 바라보라고?

적당한 거리를 두라고?

 

한겨울 밤이 깊이 막막해지면

이제 별꽃이나 따자, 이별꽃

마음 없는 말이라도 한마디 할까, 아니네!

 

 

 

♧ 나는 날마다 무덤을 짓는다

 

해가 지면

문을 닫고 하루를 접는다

 

하루는 또 하나의 종점

나는 하나의 무덤을 짓는다

 

문 연 채 죽는 것이 싫어

저녁이면 대문부터 창문까지 닫고

 

다 걸어 잠근 고립무원의

지상낙원을 만드노니

 

둘이 살다, 셋, 넷, 다섯,

이제는 다들 떠나가고

 

나만 혼자, 홀로, 살다 보니

집이 천국의 무덤이 되었다.

 

 

 

♧ 고독사 1

 

남의 일이 아니다

내일 일 아닌 내 일이구나

 

내 나이 몇이라고?

벌써 팔십이 넘었다고!

 

부드럽게 말해도

너무 팔팔하고 쌘 발음이 영 안 좋네

 

팔아먹을 게 남아 있긴 한 것인가

살 수는 있는가, 뭐로 뭘 사겠는가

 

그럼 죽는 것인가

난감하네 난감하네

 

독 오른 고추 몇 개 따다

날된장 찍어 술안주나 하자!

 

 

 

♧ 나는 무엇인가?

 

건강보험료 납부 증명서를 떼어 보니

“해당 없음”이라고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이 증명합니다

 

납세증명서를 떼어 봐도

“해당 없음”이라고

도봉세무서장이 밝히고

 

이어 지방세 납세증명서를 떼어 봐도

“해당 없음”이라고

서울특별시 강북구청장이 증명해 줍니다

 

나는 대한국민이긴 한 것인가

이러고도

내가 대한민국 국민이 맞는가

 

국민 여러분 미안합니다

내가 그간 칡처럼 등나무처럼,

담쟁이덩굴처럼 살았나 봅니다

 

이제 칡과 등처럼 갈등하지 않고

차탈피탈 핑계 대지 않겠사오니

해량하시기 바랍니다.

 

 

 

♧ 세란헌洗蘭軒 • 2

 

물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으로

난잎을 씻고

내 마음을 닦노니,

 

한 잎 한 잎 곧추서고

휘어져 내려 허공을 잡네

바람이 오지 않아도

춤을 짓고,

 

푸른 독경으로 가득 차는

하루 또 하루

무등, 무등 좋은 날!

 

 

          *홍해리 시집 『네가 찾아온 날 나는 내게 없었다』 (놀북, 2025)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