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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홍경희 시집 '울었던 자리마다 돌을 쌓으며'의 시(6)

by 김창집1 2026. 4. 8.

 

♧ 몸에 복사꽃 피던

 

의심을 거두면 평온한 하루라 했으나

간절한 마음은 꽃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나는 또, 어긋난 생각을 품는다

 

개복숭아나무,

심방이 요령을 내려놓으며

동쪽을 향한 가지를 꺾어 오라 했다

이유는 없다, 묻지도 않았다

 

꽃은 이미 져 버렸다

어두운 눈으로 들판을 헤매어도

잎이 오른 나무들만

서걱이며 나를 감쌌다

 

선득한 바람 앞세워 걸은 끝에

내 키만 한 개복숭아나무에 겨우 닿았다

 

세 개의 가지를 살금살금 꺾었으나

나무는 서쪽으로 휘어졌다

 

낮은 처마 아래

푸닥거리 굿상 위에 놓인 개복숭아나무 가지

 

갑작스레 늙은 심방이 휘파람 소리와 함께

그 가지로 내 등짝을 내리치는 순간,

 

놀라 울음조차 잊고

사정 모를 매가 이어져도

까닭을 알지도 못한 채

 

눈물 대신 서러운 죄를 생각하고

맞아도 굽히지 않는

내 몸의 빛을 떠올렸다

 

끝내 소리조차 삼킨 그 자리,

꽃은 다시 피어났다

 

 

 

♧ 구석의 시간

 

카페에 여섯 시간 혼자 앉아

블랙커피를 마십니다

어둠을 넓히는 나의 일입니다

 

노트에 커피를 쏟으면

얼룩진 생각들이 눅눅하게 번집니다

 

누군가 혀 차는 소리, 스쳐 갑니다

 

끼니 걱정 없는 사람은

숨기 좋은 구석의 온기를 모릅니다

 

뒤틀린 문장 속에서도

시간은 느리게 흐르고

바람은 멈추지 않으며

바깥 은행잎은 아주 느리게 내려 앉습니다

 

놓아 버린 것이 무엇일까요

 

잃을 것이 없어서

오히려 따뜻합니다

 

구석의 시간도

창문 틈으로 스며든 빛과

잔잔히 섞입니다

 

 

 

♧ 부재

 

행사장 스크린 속,

눈물이 흘러내릴 때마다

왼쪽 주먹으로 닦았다

 

‘억울해서 흘리는 눈물’이라는

자막이 내 얼굴 위로 내려앉자

사람들은 힐끔거렸다

 

기억나지 않는 내 눈물보다

덧씌워진 해석이 더 억울했다

 

밤새 사진첩과 기록을 뒤졌지만

내 얼굴은 어디에도 없었다

 

존재하지 않는 나와

점점 가까워졌다

 

그때 불쑥, 격자무늬 햇살이 머리맡으로 들어왔다

따뜻한 빗속에 먼지가 흔들리며 부유했다

 

문득 한 사람도 떠올랐다

 

소주잔 앞에서

한 선배가 나 때문에 억울하다며

눈물을 글썽였다는 어느 저녁,

그 선배의 잘못을 꺼내기도 전 그 눈물에 약해져

그저 술잔을 채워 주며

“그래, 그래." 달래 주었다는 그 한 사람

 

그 한 사람이 내 곁에는 없던 그때처럼

나와 눈물은

햇살 속 빈칸으로 남아

 

여전히

그 한 사람의 빈자리가 흔들렸다

 

 

 

♧ 질문

 

남은 낙엽 틈에 물집이 잡혀 있는 동안

사흘 구름, 사흘 햇살, 사흘 비가

차례로 내 안으로 스며들었다

 

단절을 천천히 떼어 낸 여백은

아무리 붉게 물들여도 뜨거워지지 않았다

 

일요일 아침, 사방 환한 카페 둥근 테이블 위

타로를 펼친 소녀에게 묻고 싶었다

 

꽃 무더기, 거품처럼 사라졌는데도

그리움이 찾아오는 날은

언제 사라질까

 

굳어진 눈물에 젖은 상처는

언젠가 가려워질까

 

차라리 더 늦기 전에

유리잔에 별무늬 담아 놓은 어린 점성술사에게

물병자리의 세 번째 별빛을 건네며

모든 행운과 불운을 뒤섞어 달라

부탁하고 싶었다

 

어깨 위 묵은 통증이

궤도를 바꾸는 날이었다

 

다가올 계절에도 세상은 여전히 무사할까

숨 한줌 제대로 고르며 살아갈 수 있을까

 

 

 

♧ 걸음과 그림자

 

#걸음이 쏟아진다면

 

섬의 여자들은

나이가 들수록 걸음과 표정이 서로 닮아 간다

 

겨우 마주 오던 할머니가

어머니 같아 어리둥절한 사이,

발밑이 허물어진 듯 할머니 몸이 다급하게 땅으로 끌렸다

 

쓰러져도 굽은 등은 펴지지 않았다

 

“어머니, 빨리 일어납서."

옆에서 성글게 걸어오던 남자의

툭 던지는 목소리,

걱정보다 먼저 부딪쳤다

 

차가운 흰머리의 아들이

엉거주춤 일으켜 앉혔으나

균형은 잡히지 않았다

 

“나, 더 못 걸으켜."

이빨 빠진 말이 앙상한 몸에

축축하게 달라붙었다

 

삭정이 같은 다리로 움켜쥐던 길을

놓아 버리는 오후

 

아들은 무표정했고

햇볕이 이지러졌다

 

사라봉 절벽 흰 등대도

눈을 감고 있었다

 

괜히 어깨의 가방이 무거워진 나도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택시는 세워지지 않았고

아들은 가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입이 바짝 마른 길바닥에

주저앉은 할머니는

그림자처럼 낮았다

 

 

 

#제자리에 없다면

 

“나, 더 못 걸으켜."

그 목소리는 오래전 내 어머니와 겹쳤다

 

뇌졸중으로 반쪽을 잃은 어머니는

걸음 연습을 독촉할 때마다

같은 말을 되풀이하며 눈물지었다

 

지팡이에 의지해 겨우 일어서도

발은 땅에 닿지 못했고

끝내 엉덩이로 밀고 나가야 했던 날들

 

아무리 보고 싶어도 뵐 수 없던 어머니,

섬을 떠나는 내 앞에

걸음한 이유를 묻고자 뒤돌아보았으나

마지막 걸음을 떼어야 오를 수 있는

하늘은 새조차 날지 않았다

 

오르막에

서로 업을 수도 업혀 갈 수도 없는 그림자만

멈춰 있을 뿐이었다

 

 

 

#행방을 모른다면

 

막다른 길에 비까지 내렸다

발자국 속으로 미끄러질 때

물비린내가 올라올 때

시큰거리는 돌멩이에 발이 닿을 때

고집이 무너질 때

섬의 흉터를 어루만지는 바람을 느낄 때

 

발밑의 흔적들이

말없이 나를 붙잡았다

 

그럴 때마다

“못 걸으켜."

고통스러운 걸음이 떠올랐다

 

나의 가장 먼 걸음인 땅끝에서

아파서야 보이는 빛처럼

눈 위 흔적에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슬퍼 보이는 발자국은

슬쩍 주워 양지로 옮겨 주고 싶다가도,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며

새 울음을 듣곤 했다

 

어느 날, 푸른 보리밭이 바다를 부르고 있었다

바다의 오래된 발자국

섬을 부르고 있었다

 

나의 걸음 또한 머지않아

그 발자국을 따라나설 것이다

 

 

             *홍경희 시집 『울었던 자리마다 돌을 쌓으며』 (걷는사람, 2025)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