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버리기
게으른 나를 잔소리로 묶어놓더니
오늘은 아내가 십여 년 만에
허름한 내 서재 정리에 앞장선다
여기저기 널브러진 각색의 종이들
“이건 뭐우꽈? 저건 또 뭐고"
오래 뒹구는 내 작품 초안들인데
“보난 어지령만 ᄒᆞ우다
익도 안ᄒᆞ는 저 책덜광 ᄒᆞᆫ디 다 데껴붑서"
큰 비닐봉투에 눌러 담는다
감사패 공로패 여러 가지 기념패들
“씰데읏인 것덜 다 버립서 뭣에 쓰쿠광"
종량제 자루에 꾹꾹 담아 넣는다
-아, 저것들 한줄기 내 영혼들인데
“내가 잘 분류하며 정리할게"
“아까왕 말앙 데껴붑서 다 쓰레기우다
ᄒᆞᆫ저 ᄒᆞᆫ저 ᄒᆞᆸ서게 연속극 ᄒᆞᆯ 시간 뒘수다“
-그래, 다 버려야지 예순여섯이나 버렸는데
이제 내 출연시간이 다 끝나는 모양이군

♧ 어머니를 다시 보내며
그립던 어머니를 26년 만에 만났다
오등봉 옆 산소에 누워 계시다가
2025년 양력 6월 15일 새벽 세시 반
나와 마주하여 세상을 다시 보는 어머니는
예전처럼 여전히 고우셨다
작은 칠성판에 눕고 명정에 덮인 어머니를
가슴에 부여안고
양지공원 화장터 가는 길
어머니, 어머니, 우리 어머니
불러보며 불러보며 울었다
바람과 풀숲이 어울려
가슴 아렸던 어머니의 인생을 두런거리고
잠시 이승을 스쳐가는 저승길도
나와 함께 성큼성큼 걸어주었다
양지공원을 나와
봉개 문중 세장산*을 향하는 차 속
내 무릎에 앉은 따스한 봉안봉지*가
어머니의 체온인 듯 스며든다
한줌 재로 가벼워진 어머니
어느 하늘에서든 훨훨 날으시겠다
---
*세장산 : 문중의 묘역.
*봉안봉지 : 유골 화장한 재를 담은 봉지.

♧ 각시신디
나 눈 소곱에
이녁이 살암시난
나 귀 소곱에
이녁이 살암시난
나는 눈ᄀᆞᆷ아도
이녁을 봐질 거라
저 산 넘엉
멀리 강 셔도
이녁 목청 들릴 거라

♧ 장마와 목각인형
올여름엔 울어도 되겠지요
이제 그만 메말라야겠어요
수신의 옷깃을 살폿 얼만지던
내 청춘 한 무대가
나를 뿌리치며 창밖에 펼쳐지더니
열흘 넘게 저리 슬픈 공연을 하네요
꽃잎 분분하던 한라산도 웁니다
뒤안길 내 명치끝처럼 웁니다
가풀진 산마루를 닦달하는 천둥 번개가
아스라한 기억마저 조각내네요
붙들지 못한 일탈은 갈대였어요
좌심방 어디쯤 정답을 구겨놓고
아집의 내 사랑은 그걸 펴지 않더군요
갈등의 미립자들 저리 흩뿌리며
이제 펑펑 다 울어도 되겠지요
그날들 삼켜둔 본류의 눈물샘
올여름엔 기어이 말려야겠어요
이윽고 나는 메말라가는 목각인형
살가운 당신 옷깃에 스며들지 않게
바람 속 빗금으로 저렇게 울겠어요

♧ 해지기붉음
시상에 나완
꼿밧디서 살앗네
곳을 좋아ᄒᆞ당 보믄
꼿이 뒌덴 ᄒᆞ관테
물로 막아진 돌아섬에서
어떵어떵 ᄌᆞᆫ뎌왓네
겐디, 오널 ᄒᆞ루도
ᄂᆞ시 서러레 가고
소들아가는 나 꼿섭더레
불 닮은 청춘 삐여대는
저 도들오름 헤지기붉음*
---
*헤지기붉음 : ‘저녁놀’의 제주어.
*양전형 시집 『나 다시 필 거야』 (한그루, 2025)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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