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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양전형 시집 '나 다시 필 거야'의 시(12)

by 김창집1 2026. 4. 9.

 

♧ 버리기

 

게으른 나를 잔소리로 묶어놓더니

오늘은 아내가 십여 년 만에

허름한 내 서재 정리에 앞장선다

여기저기 널브러진 각색의 종이들

“이건 뭐우꽈? 저건 또 뭐고"

오래 뒹구는 내 작품 초안들인데

“보난 어지령만 ᄒᆞ우다

익도 안ᄒᆞ는 저 책덜광 ᄒᆞᆫ디 다 데껴붑서"

큰 비닐봉투에 눌러 담는다

감사패 공로패 여러 가지 기념패들

“씰데읏인 것덜 다 버립서 뭣에 쓰쿠광"

종량제 자루에 꾹꾹 담아 넣는다

-아, 저것들 한줄기 내 영혼들인데

“내가 잘 분류하며 정리할게"

“아까왕 말앙 데껴붑서 다 쓰레기우다

ᄒᆞᆫ저 ᄒᆞᆫ저 ᄒᆞᆸ서게 연속극 ᄒᆞᆯ 시간 뒘수다“

-그래, 다 버려야지 예순여섯이나 버렸는데

이제 내 출연시간이 다 끝나는 모양이군

 

 

 

♧ 어머니를 다시 보내며

 

그립던 어머니를 26년 만에 만났다

오등봉 옆 산소에 누워 계시다가

2025년 양력 6월 15일 새벽 세시 반

나와 마주하여 세상을 다시 보는 어머니는

예전처럼 여전히 고우셨다

 

작은 칠성판에 눕고 명정에 덮인 어머니를

가슴에 부여안고

양지공원 화장터 가는 길

어머니, 어머니, 우리 어머니

불러보며 불러보며 울었다

 

바람과 풀숲이 어울려

가슴 아렸던 어머니의 인생을 두런거리고

잠시 이승을 스쳐가는 저승길도

나와 함께 성큼성큼 걸어주었다

 

양지공원을 나와

봉개 문중 세장산*을 향하는 차 속

내 무릎에 앉은 따스한 봉안봉지*가

어머니의 체온인 듯 스며든다

한줌 재로 가벼워진 어머니

어느 하늘에서든 훨훨 날으시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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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장산 : 문중의 묘역.

*봉안봉지 : 유골 화장한 재를 담은 봉지.

 

 

 

♧ 각시신디

 

나 눈 소곱에

이녁이 살암시난

나 귀 소곱에

이녁이 살암시난

 

나는 눈ᄀᆞᆷ아도

이녁을 봐질 거라

 

저 산 넘엉

멀리 강 셔도

이녁 목청 들릴 거라

 

 

 

♧ 장마와 목각인형

 

올여름엔 울어도 되겠지요

이제 그만 메말라야겠어요

수신의 옷깃을 살폿 얼만지던

내 청춘 한 무대가

나를 뿌리치며 창밖에 펼쳐지더니

열흘 넘게 저리 슬픈 공연을 하네요

 

꽃잎 분분하던 한라산도 웁니다

뒤안길 내 명치끝처럼 웁니다

가풀진 산마루를 닦달하는 천둥 번개가

아스라한 기억마저 조각내네요

 

붙들지 못한 일탈은 갈대였어요

좌심방 어디쯤 정답을 구겨놓고

아집의 내 사랑은 그걸 펴지 않더군요

갈등의 미립자들 저리 흩뿌리며

이제 펑펑 다 울어도 되겠지요

 

그날들 삼켜둔 본류의 눈물샘

올여름엔 기어이 말려야겠어요

이윽고 나는 메말라가는 목각인형

살가운 당신 옷깃에 스며들지 않게

바람 속 빗금으로 저렇게 울겠어요

 

 

 

♧ 해지기붉음

 

시상에 나완

꼿밧디서 살앗네

곳을 좋아ᄒᆞ당 보믄

꼿이 뒌덴 ᄒᆞ관테

물로 막아진 돌아섬에서

어떵어떵 ᄌᆞᆫ뎌왓네

 

겐디, 오널 ᄒᆞ루도

ᄂᆞ시 서러레 가고

소들아가는 나 꼿섭더레

불 닮은 청춘 삐여대는

저 도들오름 헤지기붉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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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지기붉음 : ‘저녁놀’의 제주어.

 

 

                       *양전형 시집 『나 다시 필 거야』 (한그루, 2025)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