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선착순
달리기를 잘 못하는 123번 훈련병에게
선착순이라는 커다란 단어는
지옥의 속삭임처럼 무섭게 들렸다
뛰고 뛰고 또 뛰고
내 뒤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능력이 뛰어난 친구들은
한 번 아니 두세 번이라도 나보다 더 잘 뛸 텐데
그들은 그늘에서 힘겹게 뛰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일부는 연민의 눈으로
몇몇은 안도감의 눈빛으로
더러는 거만한 자세로
태어난 순간 부여받은 수저의 색깔로
등수가 매겨지는 선착순의 세상
죽을 둥 살 둥 뛰어 이제 좀 쉴 만하면
다시 울려 퍼지는 소리
선착순!
지옥문 들어가는 그 순간까지
선착순! 선착순!
오늘도 열심히 달리는 당신
남보다 빨리 가야 할 종착지는
어디인가요?

♧ 송곳
송곳을 갖고 있습니다
애착인형 같은 것입니다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만지작거릴 것입니다
꼬마 시절 지나가는 개가 달려들까 무서워
주머니에 넣어둔 작은 돌멩이 같은 겁니다
겁이 나도 주머니 속 돌멩이를 믿고
용감해지는 나였으니까요
송곳은 세상이 내게 박아댄 못이었습니다
가슴을 후벼파던 못을 빼내서 갈고 갈았습니다
주머니에 넣어두니 내 허벅지만 찔러대지만
그래도 아프니까 안심이 되는
그런 송곳을 만들었습니다
혹여 하늘이 무너지면 구멍을 뚫을
송곳을 갖고 있습니다

♧ 사면초가
결국엔 전의를 상실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성묘객 다녀간 묘소 주변 풀처럼
쓰러져 말라가는 모습이 그려진다
지역구 주민들이 아른거릴 것이다
상대 당 의원이 연속으로 장을 쳐온다
권위는 있으나 지략이 부족한 왕을
목숨으로 멍군하며 가로막기에는
한계가 있음을 안다
초패왕도 알고 있다
역발산기개세도 한때였음을
용산으로 천궁遷宮을 했으면
양포분할兩砲分割하듯이 당정분리黨政分利를 해야는데
모두가 용산을 지키기에 혈안이다 보니
상대의 기물은 이백 가까이 가고
그들의 기물은 겨우 백을 넘기고 있다
대책 없는 천궁을 하고
명하니 천공만 바라보다
어느 순간 외통수에 걸릴 것이다
순리라는 게 있다
차에게는 길을 터주듯 기업하기 좋은 나라
포에게는 다리를 만들어주듯 서로 돕는 나라
마와 상에게는 멱을 터주듯
모든 백성이 편히 숨쉬는 자유로운 나라
온통 거꾸로인 세상
애꿎은 백성들의 죽음에
매일 매일 추모제가 열리는 나라
사방에서 초가가 들려온다
온 나라가 촛불을 들고 있다

♧ 감저에 싹이 나서
눌 속을 해집어 꺼낸 감저를 구워 먹던 아이가
감저눌인 줄 알고 할아버지 토롱을 파헤치던
서늘한 기억이 떠오르는
주정공장
좋은 시절이 돌아와 감저에 싹이 피고
그 싹들이 이곳저곳으로 줄기 뻗어
한라산을 휘감고 넓은 태평양을 물들일 거였다
거친 땅일지라도
탄탄한 갈중이 갈적삼이 종일 함께하여
36년 억눌린 가슴들을 펴줄 것이었다
못 배운 글도 가르칠 것이었다
감지에 싹이 나서 이파리가 감저
사람답게 살고자 한 사람들
새 세상에서 함께 사는 세상 만들자 했던 사람들
초토화 작전에 사람들은 내몰리고
아무도 거두는 이 없이 꽃이 피고
뿌리내릴 곳을 찾다가
대대손손 살아갈 터전을 찾다가
산마다 들마다 해변 백사장까지
널린 백골처럼 배때기가 되기도 하고
씨감자가 됐을 많은 감저들은 가마니에 담겨 실려와
감저눌 같은 주정공장에 쌓였었다
더러는 육지로 배 타고 가다가 수장되기도 하고
속까지 썩었다고 바로 총살당하기도 했지만
살아남은 감저들은 싹을 틔운다
산과 들에 흩뿌려졌던 감저들이
서서히 이파리를 만들고
감지에 싹이 나서 이파리가 감저

♧ 꿈
간밤에 아내가 물었다
한 20억쯤 있으면 오빠는 뭐 할래?
글쎄 한 10억으로 집을 사고
10억은 저축해두고
1년에 5천만 원씩 20년 동안
글만 쓰면서 살면 어떨까?
당신은 소설 쓰고
나는 시를 쓰며
간간이 찾아오는 사람들과
자 한잔 나누면 참 좋지 않을까?
생각만 해도 가슴 떨리는 꿈이라
손 꼭 잡고 잠에 들었는데
쓰레기통에 로또 용지가
아침 햇살처럼 찢어져 있다
아내의 기침소리가 흩어진다
밤사이 아내의 얼굴이 수척해졌다
*양동림 시집 『거울상 이성질체』 (한그루, 2025)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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