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김진숙 시집 '잠깐이라는 선택'의 시(6)

by 김창집1 2026. 4. 13.

 

♧ 천국의전

 

마지막을 마중하고

마지막을 배웅하는

 

뒤는 보지 말고 앞만 보고 가시라

 

불문율 지켜 온 하루

그 골목을 지난다

 

까만색 양복 차림에 장의차를 닦는 사람

돌담에 내리꽂는 겸손의 햇살들과

십일월 먼나무 열매 그늘마저 환한 날

 

트랙터 훑고 간 자리

메밀밭도 지워진다

 

꽃 피고 당신 지고 이별은 예고도 없이

 

마지막 인사를 하고

마지막을 배웅하는

 

 

 

♧ 서쪽의 온도

 

노을을 펼쳐 두고 함께 걷던 언젠가

 

당신은 길가에 핀 달맞이꽃이 궁금하고

 

나는 또 괭이갈매기 울음소리에 기대고

 

다른 곳을 볼 때마다 깨진 거울 같았지만

 

떨림이 사라졌다고 멀어진 게 아니란 걸

 

밑바닥 그림자마저 우린 이미 닮아 가는걸

 

곁을 준다는 건 서쪽을 내어 주는 일

 

마주한 저녁상에 끼륵끼륵 안부를 묻는

 

새들도 눈치챘을까 내 안에 사는 당신

 

 

 

♧ 해동 일기

 

두서없이 쟁여 둔 육식성의 붉은 시어들

울음 다 빠져나가도록 모르는 척했다니

 

물기를 잃은 문장은

시가 되지 못하고

 

저녁은 마음을 꺼내 해동 버튼 누른다

한 번 닫힌 마음은 비틀어진 생선 같아

 

다 녹아 풀릴 때까지

쓰고 또 쓰라 한다

 

캄캄한 풍경 속으로 나를 던져두고

어제를 잃어버려 푸석해진 사랑이여

 

푸르게 싹이 나도록

닦고 또 닦으라 한다

 

 

 

♧ 어떤 잠에 대하여

 

리모컨을 손에 쥔 건 소파의 오래된 습관

빈틈없는 사람처럼 또 하루 살아 냈으니

푹 꺼진 당신의 옆구리 이해한다 말해 줄까

 

풍선에 바람 빠지듯 새가 되어 날아가는

깜빡하면 잠들고 깜짝할 새 깨어나는 새

꽃잠도 귀잠도 아닌 노루잠이면 어때요

 

 

 

♧ 뿔소라의 노래

 

  오조리 뿔 같은 여자 단번에 삼켜 버린 말

 

  마지막이라는 말은 살기로 작정한 말 물로만 물로만 돌아진 섬이라서 눈뜨면 해 뜨면 바다로만 기울던 그 여

자 그 억겁을 무엇이라 부를까 여든 고개 넘었어도 바다가 부르더라 병상에 누웠어도 바다가 먼저 찾더라 한숨

도 바다에 들면 소라 전복 되더라 영등할망 재운 바당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물에 들기 좋은 날은 바다가 허

락한 날 바다가 허락한 만큼 딱 거기까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거기까지만 부를 거야 아무리 힘에 부쳐도

숨을 먹진 않을 거야 물결치는 저 바당 재와 줍서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설 명절 조상님 상에 소라라도 올

려야지 혼잣말 너울너울 파도 따라 잠긴 날,

 

  물숨은 껍데기에 들어 한참 머물다 가셨다

 

 

                  *김진숙 시집 『잠깐이라는 선택』 (걷는사람, 2025)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