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천국의전
마지막을 마중하고
마지막을 배웅하는
뒤는 보지 말고 앞만 보고 가시라
불문율 지켜 온 하루
그 골목을 지난다
까만색 양복 차림에 장의차를 닦는 사람
돌담에 내리꽂는 겸손의 햇살들과
십일월 먼나무 열매 그늘마저 환한 날
트랙터 훑고 간 자리
메밀밭도 지워진다
꽃 피고 당신 지고 이별은 예고도 없이
마지막 인사를 하고
마지막을 배웅하는

♧ 서쪽의 온도
노을을 펼쳐 두고 함께 걷던 언젠가
당신은 길가에 핀 달맞이꽃이 궁금하고
나는 또 괭이갈매기 울음소리에 기대고
다른 곳을 볼 때마다 깨진 거울 같았지만
떨림이 사라졌다고 멀어진 게 아니란 걸
밑바닥 그림자마저 우린 이미 닮아 가는걸
곁을 준다는 건 서쪽을 내어 주는 일
마주한 저녁상에 끼륵끼륵 안부를 묻는
새들도 눈치챘을까 내 안에 사는 당신

♧ 해동 일기
두서없이 쟁여 둔 육식성의 붉은 시어들
울음 다 빠져나가도록 모르는 척했다니
물기를 잃은 문장은
시가 되지 못하고
저녁은 마음을 꺼내 해동 버튼 누른다
한 번 닫힌 마음은 비틀어진 생선 같아
다 녹아 풀릴 때까지
쓰고 또 쓰라 한다
캄캄한 풍경 속으로 나를 던져두고
어제를 잃어버려 푸석해진 사랑이여
푸르게 싹이 나도록
닦고 또 닦으라 한다

♧ 어떤 잠에 대하여
리모컨을 손에 쥔 건 소파의 오래된 습관
빈틈없는 사람처럼 또 하루 살아 냈으니
푹 꺼진 당신의 옆구리 이해한다 말해 줄까
풍선에 바람 빠지듯 새가 되어 날아가는
깜빡하면 잠들고 깜짝할 새 깨어나는 새
꽃잠도 귀잠도 아닌 노루잠이면 어때요

♧ 뿔소라의 노래
오조리 뿔 같은 여자 단번에 삼켜 버린 말
마지막이라는 말은 살기로 작정한 말 물로만 물로만 돌아진 섬이라서 눈뜨면 해 뜨면 바다로만 기울던 그 여
자 그 억겁을 무엇이라 부를까 여든 고개 넘었어도 바다가 부르더라 병상에 누웠어도 바다가 먼저 찾더라 한숨
도 바다에 들면 소라 전복 되더라 영등할망 재운 바당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물에 들기 좋은 날은 바다가 허
락한 날 바다가 허락한 만큼 딱 거기까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거기까지만 부를 거야 아무리 힘에 부쳐도
숨을 먹진 않을 거야 물결치는 저 바당 재와 줍서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설 명절 조상님 상에 소라라도 올
려야지 혼잣말 너울너울 파도 따라 잠긴 날,
물숨은 껍데기에 들어 한참 머물다 가셨다
*김진숙 시집 『잠깐이라는 선택』 (걷는사람, 2025)에서

'아름다운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한라산문학동인회 '한라산문학' 제38집의 시(6) (1) | 2026.04.15 |
|---|---|
| 젊은시조문학회 작품집 '돌돌돌 흘러온 시간'(5) (1) | 2026.04.14 |
| 월간 '우리詩' 4월호의 시(1) (0) | 2026.04.12 |
| 양동림 시집 '거울상 이성질체'의 시(6) (1) | 2026.04.11 |
| 김섬 제주어 시집 '오막오막'의 시(8) (1) | 2026.04.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