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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허영선 시집 '우린 천둥의 밤을 지나온 자들이어서'(1)

by 김창집1 2026. 4. 17.

 

♧ 시인의 말

 

그날을 건너온 여자들과 아이들은

그날들 이후

매일의 전쟁 투사가 되었다.

그날들은

천둥 같은 수식은 한참 모자랐다.

벼락이라 해보니 그도 모자랐다.

대체,

글도 말도 대리하지 못했으니.

어쩔 것인가.

그런데도, 돌레떡만 한 달빛이,

이파리 사이로 쏘여주던 한 촉 별빛이

길 위의 어린 심장을 안아주있던 것은 맞았다.

 

그날들 이후 돌아오지 못한 슬픈 그들에게,

천둥의 밤을 건너온 사람들에게,

모든 전쟁을 살아낸 여자들과 아이들에게

그럼에도 한 줄 찬란이 닿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2026년 3월에

                                                         허영선

 

 



♧ 양하꽃*

  -춘자에게

 

  보거라 춘자야

  너는 마을에서 제일 예쁘단 일곱 살 어쩌자고 양하 속으로 뛰어든 것이냐 그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던 초토화의 그날 하필 이 속이었냐 사흘 낮 사흘 밤 다 죽었던 내가, 겨우 가늘게 숨만 붙었던 내가, 작은 구덩이에 너희들 뉘여놓고 말았구나 단언컨대 이 에미 그 날 이후 밥상 위에 그 향 한번 올린 적 없구나 쫑긋쫑긋 노랑 솜양지꽃 눈뜨는 시절 덤벙진 우영팟 연초록에 눈이 찔렸다 파릇파릇 양하에 든 그 순간 그것들 한 마디만 더 자라 네 머리카락 덮어줬더라면 조랑조랑 작은 두 개의 구덩이에 오늘 같은 붉은 꽃 피우지 않았겠지 양하꽃대 한사코 올라올 적마다 네 겁 질린 눈동자 꾹 참은 숨소리 새들도 숨을 참았지 바시락 댓잎 소리 스치던 푸르딩딩 올레에 양하밭 폭폭폭 총대가리 후비던 그날 이후 다신 발을 옮길 수 없었다 춘자야 일곱 매듭 도리도리 돌리지 못한 에린 것아 에미 홀로 양하밭 틈새에서 한 톨 콩처럼 튕겨 나와 웅얼거리는 동박새 눈알 같은 네 눈망울 찾았다 봄눈의 양하 너른 이파리 속 네 윤나는 머리카락 찾았다 그날 이후 쿵쿵 터지는 봄 고랑에선 더 이상 아린 향이 나지 않았다 추석 명절 양하 접시 희부연 보랏빛 파르르 떨리는 박피 안 한 그것, 고여있는 그것을 만져 본다 이파리로 내려앉는 잿빛 하늘 한 장 보랏빛 어느새 하얗게 다시 오는구나 나는 가고 너는 반짝이는 꽃살로 다시 돌아오는구나 그러니 그만 부디 춘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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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강과의 여러해살이풀. 제주말로 '양에'라고도 불린다. 주로 늦여름부터 초가을 사이에 수확되어 제주에서는 추석 때면 차례상에 오르는 제수용 음식으로도 쓰인다. 어린 줄기와 꽃봉오리를 무치거나 데쳐서, 혹은 절여서 먹는다.

 

 



♧ 모자 쓴 여자

 

사람들은 날 모자 쓴 여자라 부르지

 

사람들은 모르지

모자 속에 또 모자가 있다는 걸

모자 속에 깊은 늪지대가 있다는 걸

 

미친 폭풍우가 나의 지붕을 벗기기 전까진

내 몸의 탯줄이 끊어지기 전까진

모자 속에 분화구가 생기기 전까진

난 전혀 다른 동그란 여자

조릿대마저 갈기갈기 찢어버린 폭풍우가

머리카락 한 올의 순간으로 몰아쳤어

 

난 모자 쓴 여자

사람들은 모르지

모자 속 분화구에

또 하나의 산이 있다는 걸

단숨의 폭풍에 움푹 패인 분화구를 이고 살아서

 

아무도 모르겠지만

내 머릿속엔

언제든 터지기 직전의 용암덩이가 부글거리지

사랑을 뺏은 적도 없이

사랑을 빼앗기더니

그 자리에 무참한 분화구가 자리 잡았지

뜨거움을 감당 못 하는 나의 분화구

사람들은 모르지

부글부글 끓는 분화구의 푸른 불길을

난 삽시에 뺏긴 한 사람 기다리지

양복장인 꿈꾸던,

당신이라 한 번도 불러보지 못한 사랑을

 

난 모자 쓴 여자

날마다 활활 타오르지

한밤중

화산 같은 사랑 하나 이고 살아서

 

 

 

♧ 섬의 한 여인은

 

틀림없이 그렇게 썼을 거라고 했다

글을 쓸 줄 모르니 기록을 해달라고 했다

기록을 못하고 갔던 당신을 대신해

 

밤은 와르르 지붕을 무너지게 했고

산 자들의 음을 분산시켰다

 

사랑을 해야 할 날에 분노를 알아 버렸다

발그레 진홍의 바다는

얼굴도 가슴도

함께 물든 칸나의 심장을 향해 속삭인다

네게 귀를 댈 시간을 줘볼래?

육친의 가슴에

파묻을 기쁨을 한 번이라도 줄 수 있었다면

난 그들의 말을, 영혼의 말들을

기록하고 말 거야

 

굳게 입술을 깨물었지만

불타는 집에서 일본제 책가방 그 하나만

꺼내게 해달라고 애걸했지만

아무도 그것을 끼 내주지 않았잖아

아버지의 마지막 선물이 있던

 

모욕도 거대한 광풍에

사라진 것들은 사라졌으나

사라지지 않고 뱅뱅 맴도는 것은

“제발 우리 어명 살려만 줍서”

만삭의 엄마 앞에 무릎꿇은

선명한 그날의 애걸

 

 

 

♧ 죽음은 죽음이어서 무섭지 않고

 

찾을 수 없어요

내가 찾는 건 당신의 손

여기까지 끌어왔다니까요

굴속의 새벽이었고 어둠이었어

굴의 마음이 왜 지금도

나에겐 계속되는 것일까

지금은 굴 밖 세상

그냥 내 몸이 굴을 향하였군요

 

인간의 세상이라면

그렇다면 인간 세상이 아니 있다는 건가요

 

이상하지?

사람들은 갇힌 공간에서

소리치는데

우린 왜 입을 틀어막았던 걸까

아기의 울음은 적이 되어서

더 이상 소리를 낼 수 없었지

 

굴 밖이 마지막 빛이 있던

오빠는 죽은 낭 가지에 매달렸어요

죽음은 죽음이어서 무섭지 않아

난 아무런 흔적 없는

숲의 비를 맞고 있어요

긷고 또 긷고

들추고 또 들춰도

필사의 초록은 안 보이는 거예요

 

당신은 어디로 갔나요?

 

 

      *허영선 시집 『우린 천둥의 밤을 지나온 자들이어서』 (마음의 숲, 2026)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