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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제주작가' 2026 봄호의 시(1)

by 김창집1 2026. 4. 19.

 

♧ 식구 – 강덕환

 

없어서가 아니라

비어 있었을 따름입니다

당연히 있어야 할 자리에

이제야 모셔다 놓습니다

위패나 사진이 아닙니다

사삼 시국에 사라진 아버지

일흔 해 넘겨서야

친자관계 확인하고

가족관계등록부 빈칸에

이름 석 자 채웁니다

그토록 새기고 싶었던

아버지 이름입니다

허천을 떠돌던 후레자식

저의 이름도 그 밑으로

갖다 놓습니다

비로소 양푼 밥에 둘러앉은

한 식구가 되었습니다

 

 

 

♧ 신발장 속에서 꿈을 꾸다 – 강동완

 

우리 집 현관 앞에는 나무로 만들어진 신발장이 있다

신발장을 열면 바다가 보였고 푸드덕 박쥐들이 나왔다

파도의 소리가 밤마다 층간 소음처럼 쿵쿵 들려 왔다

나무로 간이 나누어져 있는 신발장은 해변의 아파트 같았다

 

죽은 할머니의 꿈속에서 나는 혼자 울었다

죽은 할머니는 내 꿈속으로 들어와 거미줄을 만들었다

신발장에 쳐져 있는 거미줄의 울음이 내 깊은 잠을 깨웠다

 

악몽 같은 꿈에서 깨어난 나는 자꾸 머리가 어지러웠다

큼큼한 신발장의 냄새를 맡은 나는 자주 주저 앉았다

신발장 안에는 거미들이 가득했고 거미를 먹는 물고기들이 살았다

 

실종된 아이들이 몸을 웅크리고 신발장 속에 있었다

아이들은 무서워 리코오더를 불었다

신발장 속에 유령이 살았다

 

우리 가족은 잠들기 전에 몸에서 심장을 꺼내 신발장 속에 가지런히 놓았다

신발장 밖에는 햇빛이 비추고 있었고 신발장 안에는 비가 내렸다

구름들은 변검처럼 자꾸 모습을 바꿨다

 

신발장 속에 죽은 고래들이 들어가고 배꼽 없는 애인이 나왔다

 

신발장은 항상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지만 아무도 열려 하지 않았다

열리지 않았다 비밀번호 없는 얼음 금고였다

 

 

 

♧ 1957년 늦겨울 한라산 - 김경훈

   -제주도 인민유격대 마지막 사령관

 

이 산에 우리 넷만 남은 지가

벌써 일년이 넘었수다.

올해가 서기로 1957년이고

산 생활이 벌써 10년째우다.

내려 가십서!

지금은 생존투쟁을 헐 때우다.

살아남는 투쟁을 말허는 기우다.

역사투쟁은 나 하나면 족허우다.

우린 빨치산들이우다.

우린 불리한 정세 속에서도

투쟁을 멈춘 적이 한 번도 없수다.

난 제주도 빨치산 사령관이우다.

난 이 한라산이영 운명을 같이 헐 거우다.

동무들은 살아야 협니다.

한 사람이라도 살아남아야 헙니다.

내 심정을 모르쿠과?

 

 

 

♧ 사랑의 파편 – 김광렬

 

사랑하는 사람아

그대는 이제 머나먼 곳에 있으나 기억은 내 안에 있다

생시에 사랑했으나 그것이 사랑인 줄 몰랐다

그저 풀꽃 같은 한 사람을 알고 있었다고만 생각했다

예전에는 부드럽게 다가가는 방법을 몰라서

서로 다투고 멀어지고 다시 가까워지고 또 멀어지던

그 모든 소소한 일들이 사랑의 파편이었음을 알겠다

그것이 슬픈 일이든 기쁜 일이든

그대의 손짓과 눈짓 하나하나 조각조각 가슴에 박혀

상처를 남겼다 그것들은 그대가 없고 나서야

내 안에서 무슨 생물처럼 살아 꿈틀거린다

사랑하는 사람아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이제 몸의 한 부분이 되어버린 파편처럼

아파도 그것이 아픔이라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이렇게 상갓집에 와서 지금은 없는 사람을 떠올리며

이제야 지난 그 모든 것들이 사랑이었음을 깨닫는다

 

 

 

♧ 빈 의자 – 김대용

 

거리 빌딩들 사이 등 받침 없어도 좋은 시멘트 의자가

가로수 아래 앉아 있다 그곳에 쉬었다가 바로 옆 빌딩 1층

진열장에 강아지들을 보러 간다 그리고 건너편 동네 작은 공원에는

등 받침 있는 격식 갖춘 나무 벤치가 몇 개 있다

벚꽃 바람에 날릴 때쯤 오래 앉아 있었다

자기 눈망울 닮은 강아지를 유모차에 태우고 와

마주 보며 소곤소곤 이야기 하던 할머니는 요새 안 보인다.

사실 나도 강아지를 기르고 싶었다

새 운동화를 구팡에서 샀다 앞으로 매일 동네 한 바퀴

산책하려고 마음먹었다 언제부터 시작할까 생각 중인데

날씨가 궂다 하여간 우선 집 주변을 돌아보게 될 것이다

20여 년 사는 동네인데 처음 간 거리처럼

이곳저곳 기웃거렸다 새로 생긴 가게가 많다.

오래전 슈퍼였던 가게가 카페가 되었다.

슈퍼마켓 할 때 올망졸망 애를 키우던 그 주인아줌마는

카페 사장님이 되었다 낯선 도시에도 빈 의자들이 있으면

예전의 나로 돌아가고 싶지만, 그것은 지나온 시간을

거슬러 돌아가는 길이어서 어렵다

큰 길가에는 큰 서점이 생겼고 눕는 의자만 파는 가게가 생겼다.

우리 동네 큰 길가에는 가로수가 있고

일정한 거리마다 등 없는 의자가 놓여 있다.

 

 

                        *『제주작가』 2026년 봄호(통권 제92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