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강은미 시집 '흐린 날의 춤'의 시(4)

by 김창집1 2026. 4. 21.

 

♧ 행기소 가는 길

 

초목을 등질 수 없는 꿈들이 여기 모여

 

연못이 되었다는 진실을 아시나요

 

새벽녘 해를 등지고 만 걸음을 옮기면

 

거기, 또 하나의 우주가 나를 기다린대요

 

서든 동이든 이름 갖고 자꾸 뭐라 하지 말아요

 

어둠은 벗인 듯 아닌 듯 앞만 보고 걸었는걸요

 

가끔은 산동물이 물을 찾아 내려온대요

 

배치레잠자리 고랭이 위에 알을 낳았대요

 

누군가 사랑하는 일은 잔물결의 파문 같아요

 

 



♧ 선풍기

 

무더운 여름

모기 하나에도 벌벌 떠는

나의 세계는 단순한 열정

피가 흐르지 않는,

차라리 자유자재로 마디마디 꺾이는

 

쓸모가 전부인 이 세계 풍력의 방향

이쯤에서 그만 사라지는 게 좋겠어요

내 안에 너 있다는 말 참말 같아서 슬퍼요

 

오른쪽으로 기운 어깨는 뭔가 풀리지 않는,

왼쪽으로 돌아간 목은 어디론가 돌아가고픈,

몸 펴기 서너 달 만에 그림자만 길어졌어요

 

 

 

♧ 버퍼링

 

속 끓은 문장들을

너무 많이 삼켜

 

한낮이

부글부글 타오르면

 

이열치열

 

배춧잎 수악솩 찢어

콩국이나 해먹고 싶다

 

 

 

♧ 혼잣말

 

까치발로 서서 창문 너머 동귀포구 노을을 본다

버려진 탄광에 불이 붙은 듯 바다는 울부짖고

빌리가 바다를 등지고 나를 향해 달려온다

 

회전식 바의자 하나를 살 걸 그랬어

 

쓸데없이 과잉인 나의 연민은

손을 길게 뻗고

 

무능한 아버지의 손, 슬리퍼를 닮았다

 

노을 지는 시간이 하루에 1분씩 빨라지고

나는 의자가 없고 빌리는 엄마가 없고

꿈을 꾸고 싶다면 등뼈를 늘려야 한다

 

어둠이 만연체여서,

춤을 추고 싶다면

삶이 양지쪽으로 팔을 뻗고 싶다면

 

그늘이 좋은 이유는 햇살이 등에 업히잖아

 

 

 

♧ 사전에, 사정이 생겨서 쉬!

 

1.

막내는 입을 한시라도 놓는 일이 없어

어머니 국수 말아 손님들에게 휘감길 때

선반대 모래기 각시 설운 아이 달래며 쉬,

 

2.

둘째는 사랑이 많아 늘 할머니 곁에,

단 아들 잃은 묵음에 방둥이가 되었는데

똥돼지 쉿쉿거리는 건 무서워서 그만 쉬,

 

3.

궷드르, 집으로 가는 길은 높고도 먼,

볼레낭 아래 쉼팡에 옥순이와 나 둘이

누운 산 같은 머리 해쳐 다 죽일 듯이

똑,

똑,

똑,

 

4.

서른아흡,

산에서 자란 아이

바다에 누워

눈먼 가슴 작두비 내리치더니

 

간 날 돌아오네

 

시루떡 한 빔 위에 쉬,

살아서 좋아했다는

 

 

                           *강은미 시집 『흐린 날의 춤』 (한그루, 2025)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