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고내봉
억새꽃 흐드러진 산길에
잠시 솔향에 취해 오르노라면
파드득 날아오르는 장끼
까투리는 오름 밭으로 숨어들고
중턱 넘어 헐떡일 때
문득 기척에 돌아보면
모가지 높이 늘이고
나를 보고 있는 노루 가족
눈빛이 선하다.
남측으로 능선 따라
좀촘하게 모여 앉은 무덤 마을
세상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는지
들꽃들이 오종종히 피어 있다.
전망대에 오르면
하늘은 한없이 열리고
수평선은 큰 원호로 나를 두르고
해안선 따라 마을들이 다닥다닥하다.
숨이 멎은 듯 산속의 적막
또 어느 가슴 아픈 이 있어
신원을 풀어주는지
보광사의 목탁 소리가 깊다.

♧ 고향의 7월
뜨거운 햇볕
불화살처럼 쏟아지는
7월의 한 낮
미루나무 등지에 달라붙어 겨루는
매미들 노랫소리가 작은 폭포처럼
더운 바람 식혀주고
골랑챙이 맹꽁이도 뒤질세라 장단 맞추었지
나무 그늘에 누운 누렁이 밭 갈 쇠
졸린 눈 껌백이며 되새김질 게으르고
긴 꼬리 휘두르며 쇠ᄑᆞ리 다울리고
길 건너 질진 밭에
갈중이 갈적삼에 패랭이 쓴 어머니와 누이는
조 검질 서너 벌씩 매느라 허리 펼 새 없었지
산 그림자 어둠을 몰아오면
마당에 쑥불 피워 놓고
평상 위엔 조촐한 저녁 밥상
보리밥에 풋고추와 들깻잎 들나물 푸성귀
오이 된장 냉국에
잘 익은 자리 젓갈이 고소했네.
명석 펴고 드러누우면
호박꽃 웃음 짓는 초가지붕 위로
반딧불이 춤추는 듯 숨바꼭질 바쁘고
하늘 저 멀리 반짝이는 별들을 헤아리던
먼 고향의 7월이 그리워라.

♧ 고내봉 노루 가족
꼭두새벽
고내봉을 오르다 보면
잠에서 깨어나 능선을 거니는
노루 가족을 만나네
봄 안개 흐르는 아침
푸릇푸릇 연하게 올라오는
들풀을 뜯는 노루들 만나면
두 귀 쫑긋 세우고 쳐다보는
맑고 큰 두 눈동자 속으로
스르르 빠져버리네.
봄이 무르익어
수풀이 무성해 가면
짝을 찾는 수노루 쉰 목청이
온 숲에 메아리지더니
푸르던 숲에 가을이 오면
폭군 같던 햇살도 포근히 내리고
남녘으로 순하게 누운 능선에
새끼 거느린 노루 가족이
정겹기 그지없네.
해안가에 자리 잡아
서너 마을에 둘러싸인 오름,
겨울에도 떠나지 않아
어쩌다 삶의 터전이 되었는지
사연은 알 수 없지만
고내봉 찾는 이들 모두가
노루 가족 사랑하는
지킴이가 되었으면 좋겠네.

♧ 애월 하물
섬이 솟구치던
아득한 세월 멀리에서
검은 바위 뚫고
용솟음쳐 흘러나오는
맑은 생명수.
달빛 베어 문 하물
고내봉 그림자 고요히 품어 안고
흐르는 은빛 물결 위에
엽서를 쓰네.
아픈 글자마다
몸부림으로 반짝일 때
해조음이 달려와
그리움을 달래네.
두 손에 가득 담아 올린
달빛 한 줌 속에
물 길고 빨래하던 여인들의 숨소리
전설로 녹아있네.
---
*애월 하물: 제주시 애월읍 애월리 마을 중심지에 있는 용천수, 하물은
큰물이라는 뜻, 1980년 〈조선일보〉 우리나라 100대 우물에 선정됨.

♧ 조춘(早春)
입춘 날
고내봉 오르는 길 어귀
울 인에 하얗게 피워 놓은 매화
임 오시는 길 꽃잎 깔아 단장하고
길섶에 뻗어있던 새비낭
축 늘어진 가지에도
아무도 모르는 새
연두색 작은 잎눈
튀어 놓았네.
골랑챙이 버들가지에
부풀어 오르는
버들강아지
애월항 뱃고동 소리 메아리로 울려오고
솔숲 휘파람새 청아하게 노래하는
고운 하늘 아침 햇살에 더하는 온기
새봄 잰걸음 소리 지척으로 다가오는
신비하고 오묘한 섭리
두 손 모아 하늘을 우러르네.
*김충림 시집 『포구(浦口)』 (다층, 2026)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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