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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강연익 시집 '노을을 붙잡고'의 시(11)

by 김창집1 2026. 4. 26.

 

♧ 팔만사천 번뇌

 

구름이 몰려온다고 하여

하늘이 어디로 사라진 것도 아니고

구름만 오락가락한 것이다

 

화가 나면 화난 대로 슬플 때는 슬픈 대로

거기에 빠져들지 말고 마음의 움직임을

가만히 지켜보는 것이다

 

중생들의 마음속에 시시각각 일어나는

탐, 진, 치로 인하여 생기는 번뇌, 망상이

얼마나 많기에 팔만사천 번뇌라 할까?

 

 

 

♧ 나는 누구일까?

 

나는 누구이며 이 생각은 나인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진짜인 듯 연기를 해내고 있는

나는 과연 누구인가?

 

이 자리는 내가 있어야 할 곳인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

그토록 찾아다녔지만 결국 찾아보니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을 뿐이다

 

있는 것처럼 보일 뿐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일어나는 것처럼 보일 뿐 일어나는 것은

꿈처럼 환영처럼 그렇게 보일 뿐이다

나는 누구일까? 한 조각 뜬구름인 걸•••.

 

 

 

♧ 생각이 만들어 내는 것

 

삶이란 얼마나 많이 소유했느냐가 아니라

순간순간 어떻게 존재하고 있느냐로 결정되며

적게 소유하고도 풍요로울 수 있고

많이 소유하고도 부족할 수가 있다

 

내면에서 올라오는 생각 욕구 바람은 그대로 허용하되

끌려가면 안 되며 받아들이고 지켜보며

두려워 말고 허용해 보면 그래 잘 왔어. 있을 만큼 충분히 있다가 가고 싶을 때 가렴

 

생각이 만들어 낸 고통에 속지 말고 가짜란 생각이 왔다가 가도록 흘려보낼 수만 있다면

정신없이 분주히 흘러가는 삶과 세상을 먼발치에서 휴식하듯 가볍게 바라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 겨울 파도

 

제주도 애월읍 하귀 해안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구엄리 해안 서쪽으로 서치강굴이라는 바닷가에

동굴이 있어 하늬바람이 세지면

동굴에서 파도가 일어나는 명소가 있다

 

사자가 먹이를 찾아 덤벼드는 소리와

무섭게 달려드는 하얀 파도가 부서져 내리며

미친 여자의 비명소리처럼 울부짖는

하얀 이빨을 드러내고 달려드는 파도가 있다

 

오랜 인고의 힘으로 지탱해 온 바위를 사정없이 때리며

부서지고 거품을 내며 흩어지는 하늬바람의 날갯짓이여!

얼마나 아프고 괴로울까만

내일이면 파도가 사라지고 해조음도 나를 떠나리라.

 

 

 

♧ 비석

 

시공을 초월한 비석 하나

누구의 조상이 후손을 위해 남긴 표석이

이제는 주인을 잃은 듯 외롭게 보인다

비바람 눈보라에 씻기고 바래어

글자마저 읽기 어려운데 어느 후손이 이 비의 주인일까

 

너무나 바쁘게 돌아가는 시류에 현재의 평화로운

저 비석의 주인은 상상하지도 못하는 세월에 갇혀

후손 위해 얼마나 정성을 쏟았을까

후손들이 자신의 뿌리를 찾으려면

저 비석을 고귀하게 관리할 텐데

가던 길 멈추어 비문에 눈길 보내며 생각해 본다.

 

 

                  *강연익 세 번째 시집 『노을을 붙잡고』 (그림과책, 2025)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