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월간 '우리詩' 4월호의 시(3)와 금낭화

by 김창집1 2026. 4. 28.

 

 

♧ 찬 바람이 불어도 – 이규홍

 

무성했던 소문 걷어 내고 나니

비워진 가지 사이로

숨죽이던 빛이 스며든다

남은 것은 손바닥만 한 허기

무엇을 잃은 슬픔이 아니라

비울수록 가벼워지는

허기의 무게를 잰다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

하늘 정원 들어오고

더 이상 많은 것을 붙들지 말아야지

사라진 것들의 빈틈에서

고요는 단단하고

단단함은 아늑함의 바탕이 되는데

맑은 하늘을 바라보며

가쁜 숨을 몰아쉰다

찬 바람이 불어도

나무는 또렷이 서 있다

 

 

 

♧ 시옷 소리 – 윤태근

 

힘을 빼야 한단다

테니스를 배울 때 듣던 말이다

손목 어깨 힘 들어가면

아웃되기 십상이라나?

 

전립선 비대로 찾은 비뇨기과

어렵게 귀띔해 준 주치의 비법은

하초에 힘을 주지 않아야

오줌발이 시원하다나?

 

비법 써보나 마나 그저 그런데

문득 아련한 소리 쉬, 쉬이~

할머니 품에 돌려 안겨 듣던

시옷 소리가 비로소 시원히 쏟아진다

 

 

 

♧ 송년 – 윤순호

 

원탁에 홍탁을 불러 놓고

노털카 다섯이 모여

불콰한 마무리를 엮고 있다

 

한 때

교직으로

직업군인으로

공무원으로

그리고 장사꾼으로 얽혔던

 

관음죽에 걸린 오색 알전구 트리가

유난히 반짝거리고

어른의 품위 따위 해묵은 캐럴에 젖는다

기꺼이 뒷수발을 돕는

아내의 미소가 낯설지 않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아직 청춘이란 걸

 

 

 

♧ 토람부兎襤夫 씨 – 오명현

 

달집을 태우고

달집 속 폭죽이 귀청을 울리는 정월 대보름날

멀리 중동 이란에서 울리는 공습경보가

서울 시민 토람부 씨의 귀청을 찢는다

 

토람부 씨는 방공호로 향한다

심도가 얕은 구축 1, 2호선은 안심할 수 없다며

심도가 깊은 신축 9호선을 택한다

두어 번의 에스컬레이터와 계단을 지나서

포스코제 철강으로 단단하게 제작된

움직이는 은신처에 이르러서야

숨을 고른다

 

눈을 감고 시름을 잊으려 하지만

이란 정부청사와

미나브의 여자 초등학교에서 들려오는 비명 소리는

귀에 꽂은 삼성제 버즈로도

차단할 수 없다

 

달집 대신 지구의 일부분이

짙은 연기로 가려진 채 타고 있다

토람부 씨의 방공호는 안전한가

 

 

 

♧ 금낭화, 반쯤 열린 겹에 대하여 – 여연

 

산등성이 바람이 채 가시기도 전에

돌 틈에서 고요히 풀어낸 붉은 비밀

주머니 속에 감춰 둔 그리움의 무게를

땅속 깊이 부리로 새기며 산다

 

한때는 낯선 이름으로 불렸으나

이 땅의 돌과 이슬을 먹고 자란 몸

하늘 향해 하트를 반쯤만 여는 것은

채 다 말하지 않은 상처가 있기 때문

 

조각 햇살 드는 그늘진 자리에서

보라색 숨결로 피어나는 시간들

누군가는 심장이 홀린 피라 하지만

우리에겐 그저 살아내는 방식일 뿐

 

독한 것을 삭이는 오랜 방법을 알기에

봄날의 어린잎은 더 부드럽게 자라나

가끔은 반만 시들어가는 꽃잎 아래에서

두고 온 고향에 대해 생각하기도 한다

 

이제는 흔한 꽃이 되었으되

여전히 뿌리째 건너온 시간은

깊고 깊은 속살에 금빛 주머니 차고

돌과 돌 사이를 뚫고 올라온다

 

아무도 모르게 피고 지는 이력을 따라

바람 없는 날에도 저절로 흔들리며

반쯤만 열린 겹으로도 충분한

존재의 방식에 관하여

 

 

                                      *월간 『우리詩』 4월호(통권제454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