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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홍해리 시집 '네가 찾아온 날 나는 내게 없었다'(8)

by 김창집1 2026. 4. 27.

 

♧ 한범 홍형택洪熒澤

 

한범이는 내 맏손자

2004년 한글날

꿈속에서 호랑이를 품고 나서

지리산 청학동을 찾아가던 날

차 안에서 연락을 받고

꽃 한 송이 들고 병원에 들러

첫 상면을 했지

달리는 차 안에서 생각을 모아

이름을 뭐라 지어 줄까 하다

한글날 태어났으니 '한글'이라 할까

아니, 기왕이면 사내다운 이름을 주자는 생각으로

‘한범’ 즉 큰범이란 뜻을 새겨봤지만

아버지가 나에게 봉우리 '봉峯'자를 주시고

내가 아들에게 옥돌 '민珉'자를 주었듯이

아들은 손자에게 반짝일 '형熒'자를 붙여 주어

남양 홍씨 익산군파 38세손의 이름은

洪熒澤이 되었으니

洪자도물이요, 澤자도 물이니

앞뒤의 물을 막을 字는 불밖에 없지 않은가

괜찮은 선물이구나 했지

어릴 적부터 손자의 꿈이 경찰이라 하니

그것 또한 좋은 일이로다

아버지는 내가 돈을 모른다고 걱정이셨다

그래서 당신의 손자는 '사'자 직업을 원하셨지만

아들은 사람 목숨을 다루는 일은 싫다 했지

방송국 피디를 원하더니 결국 언론에 종사하게 되었다

손자는 불로 타오르기만 하는 세상에서

물의 역할을 하겠다니 쌍수로 환영!

할아버지 살아 계실 때

아버지와 내가 술상을 자리고

아들이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내게 술을 따르곤 했지

아들은 내게 증손자가 따라주는 술잔을 받으라는데

사람이 하는 일인지

하늘이 하는 일인지는 모르지만

살아지는 게 인생이니 사라질 때까지

4대가 함께하는 술상을 받아볼 수 있을까

그냥 한번 살아 볼 일이다.

 

 

 

♧ 마지막

 

11월은 둘이 하나 하나가 되는 달

11일은 둘이 평행선을 이루는 날

2020년의 이 날 오후

아내의 애잔하고 애절한 눈빛을 보고

오랜 눈맞춤을 했다

 

삼 년 반 누워 있는 동안 아내는 자주 눈을 깜박였다

깜박깜박 깜박이다

깜박대고 깜박거리곤 했다

 

그런데

이 날은 전혀 깜박임이 없이 계속 쳐다만 봤다

다시는 보지 못할 것같이

마지막으로 보는 것처럼

 

왜 그러느냐 해도 올려다보기만 했다

한참 눈맞춤을 하다

이상한 예감이 들어

눈물 한 방울 훔쳐 감추었다

 

그러고 나서

몇 시간 지난 다음날인 12일

새벽 두 시 반

아내는 내 곁을 떠나갔다

 

손이라도 한번 잡아줄 것을

볼이라도 쓰다듬어 줄 것을

 

애이불비 애이불비

哀而不悲!

 

 

 

♧ 죽음竹音

 

죽음이란 말이 왜 그리 무거운가

죽음은 대나무가 내는 소리가 아닌가

한 칸 한 칸 쌓아 올린 빈 탑마다

세상의 소리를 다 모았으니

그 얼마나 황홀한 궁전인가

날마다 펼치는 궁정음악회

우주의 소리란 소리

청아하고 애절한 소리를 다 모아

들려 주는 합창이니

죽음이란 얼마나 눈물겨운 공양이요 공연인가

백조가 마지막으로 들려 주는 울음이 아닌가

우리도 기왕에 한 말씀 남기려면

대나무 우는 소리가 어떨지

땅 속으로는커녕 뿌리처럼 옆으로 뻗지도 못하고

무한 천공으로 치솟아 보지도 못 했으니

언제 세상 소리 다 모아

땅과 하늘을 이어 볼 수 있겠는가

대[竹]는 죽은 후에도 모든 소릴 뽑아내니

우리가 죽는다는 것도

죽은 대나무 소리를 따를 일이 아닐런가

마당가 몇 그루 오죽烏竹이

한겨울에 얼어죽었다

봄이면 되살아나는 걸 보며

죽음학을 해마다 펼치게 되네.

 

 

 

♧ 독거놀이

 

오늘도 혼자 앉아

물밥 한 병, 닭가슴살 안주 해서

한 끼를 때우는데

 

겨우내 바삭바삭 가물다

모처럼 내리는 비에

귀 열고 속 아닌 속까지 적시니

 

마당가 청매 가지마다

꽃봉오리 뽀얗게 부풀고

나무 아래 부추와 돌나물도 숨이 가쁜데

 

대문을 열어 놓았나

현관문은 열려 있나

내다보아도 오는 사람 없고

빗소리만 귀를 씻어 주노니

 

유언을 하듯

유서를 쓰듯

내가 나를 벗어나는 해탈이요

내가 나를 버리려는 열반이네.

 

 

 

♧ 금주선언서

 

   “나 홍해리는 내일(2022년 5월 13일, 금요일)

부터 술을 마시지 않을 것을 선언합니다."

 

                                           2022년 5월 12일

                             북한산 골짜기 우이동에서,

 

                                                 홍 해 리 印.

 

 

  “증인 임보 시인 앞에 엄숙히 약속합니다."라고

  밝히고 내 마음을 다스리려 했는데

  믿었던 임보 시인이 거절했습니다.

 

 

  “며칠 후에 한잔합시다, 지금 이미 집에서 한잔

하고 있으니!"

 

 

   그때는 내가 “홍해리하고 술 마시자는 말 하지

맙시다!”

 

 

  “그래야지, 그래야지!"

 

 

  세상은 그렇게 흘러갑니다

  물처럼 바람처럼 흘러갑니다

  그러다 끝나겠지요

  그후엔 무엇일까요

  누가 알까요

  누가 말해 줄까요?

 

 

  그래서, 오늘 나 홀로 선언합니다!

  술과의 사랑인 전쟁을 끝낸다는 사실을 세상에

당당히 밝힙니다.

 

 

                                          2022년 5월 12일

                      서울 북한산 골짜기 우이동에서

                                                        홍해리.

 

 

                        *홍해리 시집 『네가 찾아온 날 나는 내게 없었다』 (놀북, 2025)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