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굴이 울다
-차경구
그러니까 난 이미 굴을 떠난 줄 알았어
고사리 가는 대로 졸졸 따라왔을 뿐이야
우는 소리를 따라왔어
굴이 울고 있는 거야
나는 알지
굴 밖에서도 박쥐가 어째서
내 어깨를 툭툭 치는지
석양이 끌고 온 외딴 구름이
무엇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나는 알지 늑골에 잠긴 밤의 말을
들을 줄 아는 굴속 웅크린 잿빛 아이를
어느 굴이라 했나 (벤뱅듸야…)
동생을 잃었어 (어쩌자고…)
박쥐가 건드렸나?
검은 돌이 머리칼을 잡아챈 거야
들판은 차라리 굴이 안전하다 했어
굴은 제 전부를 내줬어
내 눈앞으로 무수한 날개가 퍼덕였어
연기 속에 재를 뒤집어쓴 굴이
우는 소리를 내는 거야
나는 알지
굴 밖은 하얗게 소복했던 결
어린 소년이 연기에 질식돼 희미해질 때까지
한 아이가 굴 밖에서 울고 있던 결
(다들 어디로… 갔어…)
난 그저 따라왔을 뿐
고사리 들판이 시키는 대로
한 방향으로 왔을 뿐이야
굴 앞에서 쪼그려 울고 있었어
고사리를 안고 울고 있있어
고사리를 버리고 울고 있었어
우는 굴 앞에서 우는
백발 그 아이

♧ 모래밭에 누워서
잠들면 어김없이 모래밭에 누워 있는 거야
사투리가 몰릴 대로 몰린 후
모래밭에 누운 소녀가 올라오는 거야
나를 그냥 모래처럼 흘리지 마
가장 고통스린 상처가 거기에 있어
찾아볼 수 없는 고요가 모래 속에 있어
나는 붉은 눈의 모래밭에 누워 있는 거야
귓가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너는 누구니?
내 머리칼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너는 누구니?
높은 산을 몰아치는 파도가
온 내장을 허공에 뿜어대다가
이윽고 사위어갈 때까지
내 살에 붙어 떨어지지 않는 모래야
먼 데서 차가운 것이 휘몰아쳤어
비밀처럼 쉿이!
소녀는 허공에 떠 있는 거야
나는 열일곱, 사랑도 한번 못한
나보다 어린 여자아이가 내 얼굴을 만졌어
마음을 들킨 말미잘처럼 축축
매일 꾸던 꿈이야
그대로, 가만히, 있어봐
이건 나만 아는 꽃분향
내가 여기 묻어둔 거야
모래가 강물과 만나고 바다와 만나러 가듯
나는 아스팔트 아래 숨은 모래숲 그 소녀
가라앉은 숨을 만나러 가는 거야
나는 절대 모르지
밤마다 수심에 찬 달이 다가와
모래를 내 이마에 왜 흩뿌리는지
나는 어째서
밤마다 그 뜨거운 길에서
그 소녀를 매일 만나게 되는지
뒤척일 때마다 붉은 눈의 모래가
속삭이는 거야
웃어봐
속삭일 줄 모르는 소녀야

♧ 수리대*처럼 내 생은
사실이야
아프지도 않고 겁나지도 않고
가슴이 타던 그 비린 기억도 없던 그때
우리 집에는
수리대 잎사귀가 산만큼 쌓였지
쌓이면 쌓이는 대로 눈처럼 쌓여
저절로 거름으로 익어가는 동안
이파리는 겹겹 층층 얼마나 쌓이겠어
죽고 죽고 태어나고 몇 대 몇십 년
솜이불 같은 그 이파리 거기에 가만히 누워봐
온돌 같은 기운이 온몸으로 번져
숙성으로 갈수록 온전한
우주의 기운을 발휘하거든
다음 오는 나무가 크고 다음의 나무가 자라면서
수리대는 자기 몸으로 썩어 가는 거야
썩으면서 그대로 자라는 거야
자, 그러면 수리대는
자기 몸과 몸을 비벼 대면서
새로운 생명을 주는 거야
그러니, 어린 몸을 놀라게 하던 전기의 기억도
조금씩 치유가 되는 거라
수리대 기운에 마귀가 절대 들어오지 못했어
수리대처럼 내 바닥의 생은 썩으면서
살아난 거야
흙의 기운으로 솟아난 거야
그러니, 우린 그 수리대에 이르면 안 되나
---
*수리대 : 수릿대. 작은 대나무.

♧ 누룩으로 지낸 한철
밤이면 밀물처럼 들물처럼
소리 가 났다 우상우상
정짓간으로부터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바다가 내 방으로 들어온 것이라 생각했다
파도가 내 방으로 밀려온 것이라 생각했다
내 스물셋의 봄날
산으로 떠난 그를
기다리는 내 마음의 항에도
누룩 한 덩이가 떠다니고 있다 부글부글
한밤 내 끓어 넘치는
저 술항 속 누룩 한 덩이
지상의 가장 향그린 누룩 하나가
내 늙은 몸으로 들어와
오래 떨어지지 않는 검불을 걷어내고
말갛게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깊숙이 묻어둔 내 정지의 항아리에서
밀어 올린 그리움의 덩이가
나를 숙성시키고 있는 것을 느꼈다
내 믿음을 확신시키고 있는 것을 느꼈다

♧ 동백의 전언
사람들이 꼭 그만큼씩 사이를 두고
희노랑 꽃들은 그들끼리 뒤엉키는 봄
돌아서 오는 길에
깊고 노란 동굴을 품고 있는 너를 만났다
아, 저런
붉은 가슴은 네게만 있더냐
타오르듯 북받치듯 툭 뱉고 말았지
동백과 동백은 서로서로 소식을
듣고 짚어 하늘을 향했다
이편 사람이 저편 사람을 쫓던 밤
산에서 내려왔다는 돌담 위 한 남자
어리고 눈먼 아들을 찾아
동으로 서로 신호만 보내다가
한 발에 사라졌단다
그 젊은 아버진 어디로 갔을까
봄밤의 어깨가 그리도 무거웠을까
더 이상
동백은 서로의 소식을 묻지 않기로 했다
사무치는 기억은 기억끼리 거리가 필요한 법
이번 생은 그저 사무치는 대로 내버려둘 일
동백은 땅속에 돌 속에 얼굴을 묻고 우우
우우 밀어내는 소리를 냈지
아직도 격리된 그들의 생
가까이 아주 가까이 오고 있었다
*허영선 시집 『우린 천둥의 밤을 지나온 자들이어서』 (마음의 숲, 2026)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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