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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홍경희 시집 '울었던 자리마다 돌을 쌓으며'의 시(7)

by 김창집1 2026. 4. 30.

 

♧ 비탈

 

노크 없는 밤

사무실 구석에 혼자 앉아

노트북만 바라보다 고개를 들자

책꽂이 앞, 그녀도 노트북을 펴 놓고 앉아 있다

 

중얼거림과 처진 어깨가

서로의 피로를 비추었다

 

갑자기 창문에 빗방울이 톡톡,

밤을 따라 길게 흘렀다

집으로 가는 길은 멀어졌다

 

사람에 대한 믿음은 이미 꺼지고

책을 펼쳐도 호기심은 삼켜졌다

 

감정만 제각기 다른 속도로 몰려왔다

화는 즉각적이었고

솔직히 대답하지 못한 말들은

머릿속을 맴돌다 길을 잃었다

 

기대는 어깨 위에서 무너지고

걱정은 바람처럼 졸음을 어지럽혔다

 

슬그머니 비는 그치고

눈이 흐려진 사이 달이 떠올랐다

아무도 알지 못한 밤이 지나갔다

 

새벽빛이 희미하게 번졌지만

집으로 향하는 길은 여전히 어둠 속이다

잠이 돌처럼 내려앉는다

 

혹시, 굴러가면 너에게 닿을 수 있을까

 

 

 

♧ 거절의 방식

 

구석이 깨어날 때마다

꼭지 떨어진 계절이 떠나려 할 때마다

 

바닥에 대한 예의처럼

색깔별로, 계절별로 사들였으나

한 번도 발끝에 닿지 못한 신발들

 

한쪽 벽을 의지한 채

칸칸이 들어박혀

철철이 쌓여 있다

 

발붙이고 살고 싶은 네게 닿는 길

호기롭게 나서지 못한 그 길도

아예 태어나지 못한 길도

반듯한 상자 속에 고이 접혀 있다

 

올봄에는 기어이 나서리라

휘파람 불며 들판을 가르고

말 잔등에 올라타 물줄기도 건너리라

 

발에 가장 편안한 신발을 또 고른 날

들썩이던 길이 계단에서 덜컥,

턱에 걸려 꺾여 버렸다

 

함께 바닥에 나뒹구는 신발을 돌아보는 사이

길은 앞질러 꽁무니를 빼 버렸다

 

기우뚱,

비틀린 발목만 덩그러니 남았다

 

 

 

♧ 수평선 위의 사월

 

사글사글 다 받아 줄 듯

사월은 벚꽃을 물결처럼 피워 내고 있었다

 

너도 나도 지친 마음 한편을

그 바람에 맡기던 날

 

끝은 꽃잎처럼 가벼웠으나

뒤돌아보지 않으려

흔들리는 눈빛을 눌러 담고 있었다

 

모든 끝에는 저마다의 제자리가 있어

휘청이는 마음 위에 돌 하나를 얹어

중심을 맞추는 동안

 

하늘은 붉게 사위고

그 빛은 수면 위에서 흔들렸다

 

마른 꽃 앞에서도

설레던 한때의 눈빛마저

물결 속으로 가라앉을 즈음

 

차라리 다행이라 속삭이며

사월은 수평선 너머로 사라졌다

 

기억과 현실 사이

숨을 고른 바람처럼

 

 

 

♧ 드르쌍 내불라

 

하다못해 까치 떼가 몰려와 땍땍거려도

혀끝부터 달싹이는, 오지랖이라는 나는

 

오늘도 생색과 연대 의식을 떠벌이는 말들이

바람에 실려 올 때

차라리 귀를 닫고 밀어냈어야 했다

 

울퉁한 생각이 발부리를 툭툭 차고 있을 때

누군가 또 돌멩이처럼 던졌다

“드르쌍 내불라."

 

상한 말과 고인 잘못에도 아예 관심 말라는,

국이 끓든 밥이 끓든 나를 접어 버리라는 차가운 충고

“드르쌍 내불라."

그 한마디가 늘 나를 헷갈리게 한다

 

조근조근 돌려 말하지 못하지만 나는

기대는 높이가 아니라 관심의 영역이라는 것을 알기에

 

“드르쌍 내불라."

그 속 편한 방법은 통하지 않았다

 

기어이 입을 열어 다다닥거려도

징징대는 소리일 뿐

징 소리로는 울리지 않았다

 

체념에 밟히고 나서야

닿을 수 없는 남의 일을

내 안으로 끌어들이는

습관이 문제였음을 깨달았다

 

그런데도 어쩌랴

내 오지랖은 여전히,

관심과 외면의 경계 사이를 헤맨다

 

허공에 떠도는 말들이거나

메아리에 숨은 진실이거나

 

나는 언제쯤 무심하게

스스로 돌아설 수 있을까

 

“드르쌍 내불라.”

내 안에서도 울려 퍼질까

 

 

 

♧ 울었던 자리마다 돌을 쌓으며

 

사람 속에서 별 볼 일이 없어진 날 이후

하늘만 자주 올려다본다

 

관세음보살을 읊조리면서도

아래를 외면하는 눈빛

허풍과 오만으로 불룩해진 어깨와 배,

초 치고 돌아서는 인정머리 없는 등이 있다

 

허장성세로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고

뜨뜻미지근할 때만 열리는 입,

남의 짐과 사람값을 가볍게 비웃는 표정이 있다

 

주저앉은 무기력 속

‘사람은 고쳐 쓰지 못한다’는 충고와

울분에도 찢기지 않는 껍질,

흔들리는 이빨이 있다

 

먹구름만 늘어나는 이유,

나 자신을 아직 놓지 못해서다

 

깨진 파편 위에 눈을 감으면

어제의 그림자가 짓이겨진다

 

그럼에도 밝아질 눈이 있고

끊어진 기대 위에도

고요히 내리는 눈이 있다

 

가난에도 절하고

돌멩이에도 절하며

내려놓지 못하는 날들이 있다

 

일어서는 게 시작은 아니지만

울었던 자리마다 돌을 쌓으며

바람 속에 몸을 던져도

그림자는 따라온다

 

그래도,

남아 있는 것들이 있다

 

 

                    *홍경희 시집 『울었던 자리마다 돌을 쌓으며』 (걷는사람, 2025)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