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유화雪柳花
그대를 생각하다 참이 들면
저렇게
눈부신 꽃이 피어버리는 거였구나
눈 덮인 밤 도시의 미끄러움을 타고
접을 수 없는 운명의 날개 파닥이며
그대 생각 속으로 잠을 몰고 갔었네
제 몸 떠난 종소리가 허공으로 사라지듯
긴긴 밤 하얗게 밝히며
그대 생각 속으로 줄줄이 들어가 사라진
내 백혈구들의 끈끈한 몸짓이라네
버들가지처럼 휘늘어서서
그대 생각 속에 참든 나
봄밤 해무 속 품처럼 아늑하더니
나의 시간과 너의 시간이 마주하여
너의 눈물과 나의 눈물이 피었네
그리움이 모여들면 저렇게 피는구나
어차피 찰나일지라도
저건 분명, 선명한 우리들 꿈속이라네

♧ 그대 이름 속에
오늘도 그대 이름 속에 들어가 앉았다
세상의 모든 그리움이 몰려든다
미처 말하지 못한 나의 고백들이
이름 속으로 들어오려 기웃거린다
목이 쉬고 애가 타고
오한과 몸살을 앓고 있는
그 언어들이 기웃거릴 때
그대 이름 속에 앉은 나는
눈에서 나오는 푸른 섬광의 슬픔을
눈물이다 한 토막, 잊어라 한 토막 베어낸다
그대 이름 속은 언제나 가을이다
떨어지는 게 낙엽만이 아니다
그대를 그리며 봐오던 별들이
내 맘처럼 서서히 차오르던 달들이
수많은 상념을 낳으며 떨어진다
가을바람이 문을 두드리며 지나간다
문을 열면,
해끔한 얼굴의 그대가 먼 곳에 있다
오늘도 그대 이름 속에 그대는 없고
또아리 틀고 동이 선 꽃으로
나는 목숨처럼 외로이 앉아 있다

♧ 이녁 생각
눈이 와도
이녁 생각
비 와도 이녁 생각
나 생각은 그자
서러레 ᄃᆞᆮ는 보름ᄃᆞᆯ
뒤뜰에
울럿이 앚안
프랑스 조각가 로댕

♧ 너꽃
또다시 봄 됐다
오만 가지 꽃 피었다
하나씩 잊혀서 가는 꽃 이름들
오직 하나
잊히지 않고
늘 피어 있는 꽃 하나 있다
그건 너, 그 이름 너꽃

♧ 뚝
한 가닥 목숨 짧아질수록
내 시도 짧아져 간다
이즈음
안개꽃 한아름 품은
여자를 만났지만
뚝!
한 글자의 제목
한 글자의 시가
장미꽃으로 뜬 내 눈을 보며
안개비처럼 운다
뚝!

♧ 내 안에 사는 그대
자꾸 나를 찾아드는 여자,
폰 속 그녀의 주소를
가을 숲길 같은 내 안으로 이전시켰다
다가오던 겨울이 순식간 녹고
구석구석 봄이 꿈틀거린다
이제 내 안에 사는 그대
당구장에 술집에 낙화하는 벚꽃길에
미지의 꿈길에
내 손 꼭 잡고 다니는 그대
오늘은 봄비 우산 속
라일락꽃 무더기로 피워 올린다

♧ 가을바람
이즈음
방에 들앉아
잠과 꿈으로 산다
긴 잠을 미리 연습하는 것과
소년이 되어 세상 시작하는 꿈
내 잠과 꿈을 비집고
가을 태풍 온다는 전갈
천둥 번개
날 세우며 날아들고
산등에 숨었던 낡은 비
굵은 주름살처럼
허공을 검스레 긋는다
창가에 닿는 바람이 차웁다
*양전형 시집 『나 다시 필 거야』 (한그루, 2025)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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