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새봄 – 방순미
바위 뚫고 물오른 새싹
손끝에서 상처 될까
조심스레 바라본다
돌덩이 아래
생명을 피워낸
야생의 힘
쪼그리고 앉아 노오란 눈물
떨어지도록 바라보다
말랑한 한 생각 싹처럼 돋아
가슴에 뼈도 녹이겠다 싶을
용서,
강물처럼 흘러
깊은 고요로 잦아드는 봄

♧ 메아리에 노을이 – 도경회
지심에 봄물이 꽃잎처럼 울어
하늘에 노을은 저리도 고운가요
지그시 물 위에 앉아서 아버지
가락을 다듬는 손길에 아베 마리아
물물이 쌓이어 빛이 되는 염 하나
내 안에 머물머물 울리고 있는가요
아득한 눈빛
노래는 이름을 불러주는 이야기인가요
그 이름 부르다가 목이 메어
하늘에 메아리는 다시 뜨나니
이 귀에 웅얼웅얼 저 노을이
이제사 저물도록 들리는가요
소쩍새 그리워서 은방울꽃
꿈길에 피어 보는 고해성사
바다는 옹알이로 말을 머금어
윤슬이
저리도 서러운 까닭인가요

♧ 한 권의 책 – 김정식
이제야 나는
아버지 나이가 되어
쉰여덟에 서재를 연다.
책장은 없고
하루가 눌러앉다 남긴 굽은 허리 하나.
종이 대신
등목 뒤에 마른 땀과 흙과 쇠의 냄새가
저녁의 방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때는 몰랐다.
펼치지 못한 책들 사이로
동란 이후의 날들이
아버지의 손목을 붙잡아
다음 장을 넘기지 않았다는 것을.
먹고 사는 일은 늘 먼저 와
문장 앞에 몸을 눕혔고
논어와 중용은 서재까지 가지 못한 채
굳은살 속에 접혀 있었다.
망치는 낮게 울려 몸으로 시간을 세고
쇠 긁는 소리는 내일의 가장자리를 긋고 있었다.
이제야 알겠다.
그 모든 소리가 문장이 있고
하루는 지워지지 않는 한 줄로
몸에 새겨졌다는 것을.
막걸리는 버텨온 날들의 쉼표,
꽃 대신 내려앉은 검은 꽃가루가
노동의 문장 부호로
손바닥에 남았다는 것도.
기침이 깊어질수록 마른 손의 온기 안에서
아버지는 세상을 한 권으로 묶어
말없이 내려놓으셨다.
읽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너지지 않기 위해
책상 위가 아니라
다음 날을 살아야 할
누군가의 바닥 가까이에.

♧ 거짓말 – 김성중
아무 것도 없었다
앙상한 가지 위에 메마른 바람만 불고 있었다
침묵의 시간은 길어 갔고
이대로 시간이 멈추어 버릴까 걱정스러웠다
바람의 세기를 살갗으로 가늠하며
동장군의 화가 누그러지기를 기다렸다
입춘이 되자
나무들은 몸을 비틀기 시작했고
우수를 지나면서
드디어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봄까치가 포문을 열었다
산수유가 그 뒤를 이었고
매화도 더 참지를 못했고
살구나무도 때를 놓치지 않고
연분홍 꽃을 활짝 피웠다
개나리도 목련도 화사하게 피어났고
그 사이에 동백꽃이 수줍게 붉어졌고
벚꽃이 만개하면서 세상이 환해졌다
단풍나무가 잎과 동시에 작은 꽃을 피웠고
느티나무도 참지 못하고 이파리를 내밀었다
모과나무도 잎을 내밀었고
참고 참았던 이팝나무도 연둣빛 이파리를 내밀었다
세상이 꽃 대궐이 있다가
연둣빛 잎사귀로 변하는 동안
겨우내 푸른 이파리를 간수한
소나무 광나무 은목서 금목서 주목이 빛날 때
영산홍이 터지고 자산홍이 터지고
태산목이 곧 터질 것 같은
필 꽃들은다 피어버린 봄 정원
모든 것이 거짓말 같은
신기루 같은 봄날 오후

♧ 사과엔 상처가 많지 – 김미외
어느 날 문득 너는 사과를 내밀었지
나는 사과를 받지 않았어
사과를 깨물면
들끓는 열망의 좌절이 와싹 씹힐 것 같아서,
싸늘한 명랑이 단물인 양 흐를 것 같아서,
쥐꼬리만한 슬픔이 쩌르렁 입안을 맴돌며 어물거릴 것 같아서,
그 외에도 것털처럼 가벼운 이유들이 있지만,
이 모든 변명이 일신상의 이유이지만,
사실은
나를 깨물 수 없기 때문이었어
*월간 『우리詩』 4월호(통권 제454호)에서
*사진 : 이팝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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