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누가 묻는다면
아침 녘 안개 풀어 어제를 닦아 내는
발밑 돌멩이에도 사무친 뼈가 있다는 말
제주 땅 어디에서나 흘려듣지 못해요
당신 몸 잠시 빌려 오늘을 살아가요
짙은 어둠을 찢고 일어서는 바람 따라
한라산 불의 말씀들 새겨듣곤 하지요
아흔아흡 골짜기로 흘러내린 물의 기억
피가되고 흙이 되고 꽃이 되어 피었나니
설문대 그늘에 기대 내일을 파종해요

♧ 달방 있습니다
산지천 불빛 찾아 흘러드는 달이에요
페인트칠 벗겨진 골목의 시간 속으로
입간판 생의 화살표 그 길 따라오세요
그리움을 게우는 데 한 달이면 넉넉해요
가물대는 후렴구와 꽃 벽지에 핀 얼굴들
그림자 등 시린 밤에 등글게 떠올라요
날마다 흐릿해지다 지워지곤 한다는데
읽다가 돌아서면 밀려오는 항해의 기록
풍랑도 달래기 좋은, 달방 여기 있습니다

♧ 어머니에 어머니는
열 자식 낳았는데
아들 셋에 딸이 셋
딸이고 아들이고
차별하는 법이 없어
공부도 해야 한다고
밭에 가자 안 했대
해도 해도 끝없는
농사일 버거워도
며느리 오는 날엔
밭에 가지 않으셨대
그것은
마음이 하는 일
어머니의 어머니는

♧ 설문대할망
긴 어둠 뚫고 나은 제주 땅바람이라
망망한 바다 위에 수평선 끌어당기며
저물녘 머리끝까지 피가 도는 섬이라
우리는 흐르는 쪽으로 흐르고 흐르나니
따뜻한 마음 한 자락 가슴에 품고 있으면
말끔히 세상을 씻는 빨래터에 닿으리라
땅 씻듯 세상 씻듯 평등의 옷감을 짜듯
나란히 살아왔다고 하늘에다 쓰나니
눈물도 서러운 상처도 대신 닦아 주리니
까마귀야 울지 마라 달래듯 여기 오시라
돌이며 바람이며 치마폭에 햇살 한가득
푸르게 물길 헤치며 철썩철썩 오시라

♧ 산물
맨 처음 물은 작은 심장을 가졌을 거야
첫아이의 박동 소리 들었던 그날처럼
바람도 들었나 몰라 그 먹먹한 숨소리
검은 돌에 입 맞추며 살아 낸 길이었지
흐르다 멈추고 다시 흐르다 스며든 땅
더 깊게 파고들수록 솟구치는 함성이었지
그 내력 알 수 없지만 당신 몸에 닿으면
두 눈 맑게 하고 막한 혈도 뚫었다는
할머니 넋들임까지 받아 낸 생이었지
물허벅 물항아리 제주 여자 발자국 따라
세미물 두말치물에 나도 정성껏 손을 씻고
조반물 한 바가지로 아침상 차리고 싶다
*김진숙 시집 『잠깐이라는 산책』 (걷는 사람, 2025)에서
*사진 : 보리(유수암리, 2026. 5.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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