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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김진숙 시집 '잠깐이라는 산책'의 시조(7)

by 김창집1 2026. 5. 6.

 

♧ 누가 묻는다면

 

 

아침 녘 안개 풀어 어제를 닦아 내는

발밑 돌멩이에도 사무친 뼈가 있다는 말

제주 땅 어디에서나 흘려듣지 못해요

 

당신 몸 잠시 빌려 오늘을 살아가요

짙은 어둠을 찢고 일어서는 바람 따라

한라산 불의 말씀들 새겨듣곤 하지요

 

아흔아흡 골짜기로 흘러내린 물의 기억

피가되고 흙이 되고 꽃이 되어 피었나니

설문대 그늘에 기대 내일을 파종해요

 

 

 

♧ 달방 있습니다

 

 

산지천 불빛 찾아 흘러드는 달이에요

 

페인트칠 벗겨진 골목의 시간 속으로

 

입간판 생의 화살표 그 길 따라오세요

 

그리움을 게우는 데 한 달이면 넉넉해요

 

가물대는 후렴구와 꽃 벽지에 핀 얼굴들

 

그림자 등 시린 밤에 등글게 떠올라요

 

날마다 흐릿해지다 지워지곤 한다는데

 

읽다가 돌아서면 밀려오는 항해의 기록

 

풍랑도 달래기 좋은, 달방 여기 있습니다

 

 

 

♧ 어머니에 어머니는

 

 

열 자식 낳았는데

아들 셋에 딸이 셋

 

딸이고 아들이고

차별하는 법이 없어

 

공부도 해야 한다고

밭에 가자 안 했대

 

해도 해도 끝없는

농사일 버거워도

 

며느리 오는 날엔

밭에 가지 않으셨대

 

그것은

마음이 하는 일

어머니의 어머니는

 

 

 

♧ 설문대할망

 

 

긴 어둠 뚫고 나은 제주 땅바람이라

망망한 바다 위에 수평선 끌어당기며

저물녘 머리끝까지 피가 도는 섬이라

 

우리는 흐르는 쪽으로 흐르고 흐르나니

따뜻한 마음 한 자락 가슴에 품고 있으면

말끔히 세상을 씻는 빨래터에 닿으리라

 

땅 씻듯 세상 씻듯 평등의 옷감을 짜듯

나란히 살아왔다고 하늘에다 쓰나니

눈물도 서러운 상처도 대신 닦아 주리니

 

까마귀야 울지 마라 달래듯 여기 오시라

돌이며 바람이며 치마폭에 햇살 한가득

푸르게 물길 헤치며 철썩철썩 오시라

 

 

 

♧ 산물

 

 

맨 처음 물은 작은 심장을 가졌을 거야

첫아이의 박동 소리 들었던 그날처럼

바람도 들었나 몰라 그 먹먹한 숨소리

 

검은 돌에 입 맞추며 살아 낸 길이었지

흐르다 멈추고 다시 흐르다 스며든 땅

더 깊게 파고들수록 솟구치는 함성이었지

 

그 내력 알 수 없지만 당신 몸에 닿으면

두 눈 맑게 하고 막한 혈도 뚫었다는

할머니 넋들임까지 받아 낸 생이었지

 

물허벅 물항아리 제주 여자 발자국 따라

세미물 두말치물에 나도 정성껏 손을 씻고

조반물 한 바가지로 아침상 차리고 싶다

 

 

                               *김진숙 시집 『잠깐이라는 산책』 (걷는 사람, 2025)에서

                                             *사진 : 보리(유수암리, 2026. 5.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