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오늘도 잘 살았네 – 김은희
새벽녘 일어나서 물 한 잔과 시집 한 권
필사 노트 펼치고 기지개를 켜는 아침
백일홍 달그락 소리 아침밥이 달구나
차창 밖 코스모스 설레는 음악소리
어머니 질문마다 반복적 리듬 맞춰
한나절 하루치 웃음 나른함도 채우고
어두운 구름 사이 무언가 괜찮은 듯
필사한 구절구절 노을빛으로 가득할 때
별빛이 무지개 너머 시 한 편을 올리네

*소나무에 담쟁이
♧ 구실잣밤나무 아래 문맥 –김정숙
나무라는 이름으로 사는 시를 만났네
죽네 사네 하면서도 놓지 못한 구실 하나
머체왓 돌무더기 끼고 읽다 쓰다 한다는
꽃피다 지우고 열매 키우다 지우고
잣밤 같은 지우개똥 켜켜로 쌓으며
성공의 언어를 버려 천년이 가뿐하다는
높고 쓸쓸한 시가 청량하게 흩날리네
손에 잡히는 허공이 나무 아래 포근하네
내 시를 씹어도 좋아 구실잣밤 깨물 듯

♧ 꽃 떨어진다 - 신해정
길 위에 번지는 건 젖은 원망이 아니다
완벽하지 못할 거란 인정 없는 두려움
후두둑
다시 또다시
늘 갈림길 앞이다

*팽나무 줄기에 붙은 콩짜개덩굴
♧ 물풀의 꿈 – 안유준
모발의 새벽을
안개가 끌어안고
새소리 잠 깨우는 목장을 가로질러
습지에 빠져들었네
내 모습이 보이네
물결은 가만가만 햇빛을 품어 올려
잠든 마음 토닥이며 그 빛에 감기다가
푸르른 고요를 불러 물풀의 꿈 꾸라 하네

♧ 바람이 불어와 – 조희
나만의 버킷리스트 나침반을 따라온
안탈리아 해변은 갯내음도 투명하다
발자국 스위치 따라 저장되는 풍경들
카페에서 시작된 첫사랑 웃음 같은
석양의 수박 주스 달콤하게 물들이고
세이렌 기타 소리가 파랗게 흔들린다
여섯 시간 시차만큼 밤으로 항해하는
신화 속 요정보다 얼굴은 더 빛난다
샌들을 벗어 던진다 승리의 여신처럼

♧ 아주 작은 내 별 - 최은숙
늦은 밤 하늘에 소멸 직전 별 하나
꺼질 듯한 저 별이 내 창가에선 밝았다
별빛을 불빛 삼아서 써 내려간 글귀 하나
꿈을 위해 살다가 꿈을 먹고 사는
아주 작은 내 꿈이 다시 내게 돌아온 날
후드득 주변 별들이 창가에 와 같이 내린다

♧ 물영아리 거미 – 허경심
다섯 평 낮은 곳에 나만의 집을 짓죠
풀었다 묶었다가 어쩌면 사소한 날
스무 살 가장 낮은 곳 천장 아래 숨었죠
혼자서 나올 수 없어 누군가 기다려요
운동화 끈을 잡고 망설인 적도 있었죠
발끝에 힘을 실어요 울타리를 넘어요
모든 걸 잃는 일은 너무 쉽게 일어나죠
아무 일 없던 듯이 다시 또 안아줄래요
은둔의 실타래 너머 반짝이는 저 수면
*젊은시조문학회 작품집 제11호 『돌돌돌 흘러온 시간』 (한그루, 2025)에서
*사진 : 유수암에서 본 나무들(2026. 5.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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