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박흥순 시집 '토끼는 발걸음을 세지 않는다'(1)

by 김창집1 2026. 5. 9.

 

♧ 프롤로그 (Prologue)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발걸음을 세기 시작했습니다. 하루에 몇 걸음을 걸었는지, 얼마만큼의 성과를 냈는지, 내 삶이 숫자로 환산되었을 때 과연 몇 점짜리인지. 손목 위에 매달린 만보기는 현대인의 새로운 족쇄가 되어, 우리가 밟고 있는 흙의 촉감보다 액정 위의 숫자에 더 집착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제 잠시 만보기를 풀어두셔도 좋습니다. 길을 잃어도 괜찮습니다. 숫자가 멈춘 그곳에서 비로소 우리의 진짜 숨소리가 들리기 시작할 테니까요.

 

 

 

♧ 별똥별의 마지막 춤사위

 

어두운 허공을 가르며

별똥별은 홀로 제 몸을 태운다.

순간의 섬광,

우주에 단 한 번의 무대 위에서

자신만의 춤을 다하는 존재.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지만

그 빛의 여운은 오래 머문다.

마지막 잔향처럼,

심장을 울린 선율의 종지가

기억 깊숙이 흔적을 새기듯이.

 

그러나 그 앞에 선 우리는 겸허하다.

덧없음 앞에

노년과 질병을 숨길 수 없는

연약한 몸의 숙명을 안고,

삶의 무게를 버겁게 끌어안는다.

 

고통의 길이지만, 동시에 아름답다.

곰곰이 떠올려 본다.

삶이란 결국 한줄기 궤적,

짧디짧은 한 호흡,

스킵된 장면 같은 속도 너머에 서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안다.

전 존재를 불사른 춤사위의 의미를.

그 찰나가 얼마나 숭고한 빛인지

우리 또한 마지막 왈츠를 꿈꾼다-

남들의 기억에 고유한 빛깔로 남기를.

 

스르르 어둠에 묻히는 별똥별

그러나 남은 흔적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우리의 삶도 그러하기를

밤하늘에 작은 불빛 하나 남기기를.

찬란하지 않아도 좋다,

고유한 영원의 빛으로 호흡하고 싶다.

 

 

 

♧ 토끼는 만보기를 보지 않는다

 

토끼는 발걸음을 세지 않아요.

그 작은 움직임까지 숫자로 묶일 필요 없죠.

날렵한 몸짓, 풀잎 사이를 스치는 바람 소리,

기록되지 않아도 생생히 살아있음을 증명해요.

 

사람들은 만보기를 자꾸 들여다봐요.

걸음마다 의미를 붙이고,

숫자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하죠.

그런데 그 숫자가 진짜 친구일까요,

아니면 감시자일까요?

 

토끼는 뛰어다니고 숨쉬며

바람이 전하는 시간의 소리를 들어요.

모르는 게 있다면, 기계로는 잴 수 없는

흘러가는 시간의 무게겠죠.

 

'살아있다는 것 '을 증명하려면

숫자 놀음에 매달릴 필요 없어요.

풀잎 하나 흔들릴 때도 온 우주가 움직이는 것처럼,

우리는 스스로를 계량하며 숫자의 덫에 결려요.

 

토끼는 알아요.

자연이 새겨주는 생명의 흔적,

그 자체로 이미 증명된 삶이라는 걸.

 

그래서 말해요.

만보기는 이제 그만 보세요.

그건 숫자에 갇힌 자기 모습일 뿐이에요.

'숨결 없는 거울 속의 그림자'라고 해도 좋겠죠.

 

살고 싶다면,

바람 소리, 흙 냄새를 느끼고

심장으로 삶의 무게를 느껴봐요 .

우리는 그저 바람을 가르며 계속 달릴 뿐이죠.

 

 

 

♧ 쿵! 타오르는 침묵

 

쿵! 성찰의 불꽃이다.

어둠 속에 운명을 내려놓고

고요히 상처의 숨결을 듣는다,

심장은 쿵, 또 쿵 - 내면을 두드리는 각성의 울림.

 

고통이 문을 두드릴 때 나는 숨죽인다.

불길 속에서 진실을 캐내어

흐느낀 시간의 모래알들이

내 안의 강바닥에 차곡차곡 쌓인다.

 

나는 나를 마주한다.

흩어진 그림자 사이로 슬픔의 뼈대를 추스르며

연민이 아닌 투명한 눈으로 운명을 응시한다.

“나를 흔든 것은 칼날이이었지만,

나를 세운 것은 그 칼날이 새긴 흉터였다“

 

부서진 마음의 파편들 위로

새벽빛이 스민다.

눈물의 강은 길을 잃지 않고

저만치 흐르다가 바다로 향한다.

 

상처 위에 핀 꽃잎 하나

바람에 흔들리며 속삭인다.

“아픔은 새벽 동쪽하늘에 빛나는 별,

길을 잃을 때마다 빛나는 좌표"

 

다시, 운명의 손길이 닿을 때

나는 두려움 없이 맞잡으리라

붉은 꽃잎이 흩날리는 길 위에서

사랑을 속삭이는 길로 새롭게 나가 되리라.

 

 

              *박흥순 시집 『토끼는 발걸음을 세지 않는다』 (도서출판 서로, 2026)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