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제주 마중 – 김병심
고사리가 기지개를 켜는 동안 축복처럼 비는 내린다
제주의 대지는 온통 연둣빛 잔치 중이라
단비 한 모금에 고사리는 쑥쑥 꿈을 키운다
바람이 분다, 노래하는 돌과 춤추는 바다도 분다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구름에 손 흔들며 가는 뒷모습엔
봄을 가득 채운 고사리 가방이 꽃처럼 피어 있다
고사리를 깨울 땐 남방큰돌고래도 수면 위로 솟구쳐 인사를 건네고
나는 그 웃음소리를 따라가며 초록의 문장들을 읽어 내려간다
섬의 아침은 이토록 눈부신 생동의 마중으로 시작된다
비 오는 날에도 숲은 새로운 생명들로 소란스러우니
고사리 향긋하게 볶아 이웃과 정을 나눌까요
노란 햇살을 닮은 고사리 전과 따스한 국 한 그릇에
마음까지 포근하게 녹아내리는 싱그러운 한 철
봄과 여름 사이에 제주가 보석처럼 끼워져 있다
서둘러 가지 않아도 좋아요, 비 내리는 섬은 생명이 숨 쉬는 거대한 정원이니
먼 수평선 너머로 여행 떠난 고운 사람들도
이 눈부신 초록 물결을 타고 환한 미소로 돌아오면 좋겠다
따스한 땅에 귀를 대고 도란도란 들려오는 새순의 목소리
장미와 왕관보다 빛나는 흙의 보물들을 발견하고
우리를 마중 나은 남방큰돌고래의 항로는 언제나 설렘뿐이다
꿈속에서도 고사리를 따는 경쾌한 팔다리
실패해도 계속 자라는 봄은 우주가 피워낸 거대한 고사리
새순이 올라올 때마다 내일은 선물 같은 초록빛 나이테를 새기겠지
손끝에 고사리 물이 든 사람마다 '희망'이라 부르고
봄은 가방 가득 햇살을 담아 새벽마다 설레는 길을 떠난다
끊임없는 환희의 마중 속으로, 고사리는 저토록 씩씩하게 자라고

♧ 항해일지(2) - 김병택
거친 파도가 어둠을 만들었다
포말들 사이에 끼인 세월이
몸부림치는 것을 자세히 보니
거대한 너울 속에 들어 있는 시간은
과거도 미래도 전혀 아니었다
잠시 사라졌다가 살아나는 현재였다
내가 운전하는 배의 뒷부분에는
항시 붉은 태양의 기운을 받은
과거가 불안한 자세로 매달려 있었다
파도 소리는 매 때마다 환기시켰다
순간마다 쌓이던 바다의 분노를
날마다 거스르던 바람의 방향을
언제든지 파도가 모든 것을 삼키며
나를 몰락시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나를 더 두렵게 하는 것은
마음속의 파도임이 거의 확실했다

♧ 푸다시 – 김수열
잡귀야 잡신아 요건 보난 잡귀로다 요건 보난 잡신이로다 어떤 것이 잡귈러냐 저승도 못 가고 이승도 못 오고 이허중감중 바람길에 구름길에 놀던 것이 잡귀로구나 산으로 노는 건 산신군졸이냐 물에서 노는 건 용왕군졸이냐 매를 맞아 죽어가던 군졸이냐 물에 빠져 죽어가던 군졸이냐 불에 익어 죽어가던 군졸이냐 당에 돌아져 죽어가던 군졸이냐 그도 아니면 허접한 비상계엄 잡귀냐 폭탄주에 오리발 안주 용산 내란 우두머리 석열이 잡귀냐 건진법사 건희 잡귀냐 특전사 수방사 잡귀냐 방첩사 정보사 잡귀냐 윤어게인 잡귀냐 디올백 잡귀냐 이도저도 아니면 물 건너 바다 건너 아메리카 트럼프 잡귀냐 탈팡탈팡 구팡 잡귀냐 이 칼은 사람 잡는 칼이 아니라 귀신 잡는 칼이로다 시왕대번지칼 둘러 받아 너른 마당 번개 치듯 좁은 마당 벼락 치듯 나사나멍 나사들멍 풀어내자 쑤어나라 쑤어나라 헛쉬! 쑤어나라 쑤어나라 허엇쉬!

♧ 귀향78 – 김순남
아고 게
저 꼬부랑 할망이 내 똘이라
저 머리 흰 남자 어른이 손지렌 호염져
이팔청춘 곱닥헌 각시
오물오물 기영 뎅기는 아기 두고
불귀의 객이 될 줄을
난덜 아라시냐 게
이제사 여한 없이 불러보는
아버지우다
아흔이 넘고 백 살이 되어도
부모 앞에서는 물애기 아니우꽈
백골이 진토 되었을망정
나 죽기 전에
돌아와 줭 소망 일루엇수다
아버지!
무악한 광풍에 부모 잃은 조케를
호적 귀퉁이 내어준
큰 아방 족은 아방
제 자식 목구멍 풀칠도 어려운 밥상에
숟가락 얹고 거둬들인
큰 어멍 족은 어멍
공 갚으젠 오랏신가 예

♧ 통일을 꿈꾸며 – 김순선
꽃이 피고 봄이 오는가 싶더니
눈이 내리고
우박이 떨어지고
계절은 점점 변덕스러워라
남편은 나이가 들수록 춥다 춥다
문을 꽁꽁 닫아걸고
아내는 갱년기로 열불이 난다 하여
에어컨을 빵빵 들어
시베리아 벌판이어라
제주의 자리돔은 위로 위로 헤엄쳐 올라가고
밀감나무도 슬쩍 따라가다
경상도 어디쯤에서 얼굴을 내민다
철없는 사과나무도 덩달아 위로 위로 올라가며
강원도 어딘가에서 손을 흔든다
모두 모두 통일을 꿈꾸듯
소리 없는 발걸음 옮겨가네
온난화 탓만도 갱년기 탓만도 할 수 없어
올겨울 온열매트 고를 때는 뜨겁고 차가운
반반 기능이 작동되는 것으로
침대를 고를 때에도
딱딱하거나 푹신한 반반 기능이 작동되는 것으로
우리는 서로 다른 남남이면서
함께 사랑하며 살아가야 할
통일을 꿈꾸는 부부이기에
*계간 『제주작가』 2026 봄호(통권 제92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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