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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강은미 시집 '흐린 날의 춤'의 시(5)

by 김창집1 2026. 5. 13.

 

♧ 낙서落書

 

  아기가 깨기 전에

  그림을 그려야 해요

 

  모델료를 지불할 돈이 없어요 잠든 아기는 내 생에 최초의 모델이고요 예쁜 아기가 아니라 다행이에요 쉿, 바람에게 전해주세요 창문 밖을 서성이는 건 위 험하다고요 독서는 위험해요 코발트 블루는 혁명의 색이죠 학명이 없다구요? 황칠나무는 만병통치 약이에요 육아가 스트레스라는 건 맞죠 쉿, 낙태가 합법 이라는 거 모르시나요? 모르는 걸 묻는 게 질문이죠 네루다가 물었죠 계절들은 그들의 셔츠를 바꿔야 한다는 걸 어떻게 알지? 커튼을 바꿀래요 박수를 치 지 않아도 좋아요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릴 수 있다면요 쉿, 비밀이에요 자기에게만 집중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해로운 사람이죠 더 이상 관계에 고집을 피울 필요는 없잖아요 창란젓은 안 좋아해요 저기요,

아기가 깨어났어요 붓은 접고 글이나 쓸게요

 

 

 

♧ 한 여자

 

마흔 넘어 몽유병을 알았다지

가슴에 넣어 둔 적 없는 멍울이 만져지고

눈물이 얼어붙어서

피가 거꾸로 솟아서

 

잠옷처럼 헐렁해진 하루의 규칙들

더 이상 겸손할 수 없는 머릿결 사이

몸에서 죽은 아이를 꺼내 어르고 어르는 밤

 

강인한 여자라고

그 말 만은 하지 마

국물도 없다면서

말끝마다 사랑한다고

애초에 널 위한 잔치에 촛불은 필요 없어

 

꺼져!

 

 

 

♧ 세상의 모든 저녁

 

당신의 저녁은 여전히 안녕한가요

 

눈꺼풀이 감긴다는 건 적어도 숨은 쉰다는 것

 

현관문 걸어 잠그며 신발을 벗는 건

 

적어도 내가 나를 훔칠 일은 없다는 것

 

아직 심장이 뛰고 있다면 그 고통도 내 것

 

혹여나 처음 본 꽃의 꽃말이 궁금하다면

 

누군가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

 

친구 이름을 까먹고 전화번호를 뒤지고 있다면

 

지금은 잠자리에 들 시간이라는 거예요

 

 

 

♧ 그릴 마스터

 

고기 맛은 미블링이야

살결이 곱고 부드럽지

 

일은 안 하고 옥수수만 먹으면

지방에 기름기가 잔뜩 끼지

 

무노동 불로소득은 동물 세계의 최고 가치 인걸

 

고기 맛은 불을 다루는 기술이야

강불 약불 육질을 갖고 노는 거야

 

탁상론 임금협상은 병 주고 약 주고지

 

너 그거 알아?

고기 맛 끝판왕은

소금과 후추라는 걸

불순물은 제거해아 해

 

무정형 순수의 맛은 시도 때도 없이 달고 닳아

 

 

                       *강은미 시집 『흐린 날의 춤』 (한그루, 2025)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