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김충림 시집 '포구(浦口)'의 시(3)

by 김창집1 2026. 5. 14.

 

♧ 산철쭉 필 무렵

 

화사하게 흩날리던 벚꽃 잔지

엊그제 지나는가 싶더니,

보리밭 건너 숲에서

뻐꾸기 울음소리가 메아리지네.

 

고내봉 둘레길

하얗게 피어오르는

찔레꽃이 눈부시고

고개 들면 상큼한 봄 향 휘날리는

아카시아꽃이 꿀벌을 유혹하네.

 

짙은 감색으로 손짓하는 한라산

하늘정원 선작지왓, 윗세오름,

백록 남벽 아래 방에오름, 돈네코 계곡으로

열여섯 젖꼭지 같은 산철쭉 봉오리

빨갛게 물들어 가네.

 

꿩병아리 부화하고

보리타작 시작되면

꽃들도 제철이 끝나는 줄 알아채더라,

늦지 않게 산에 올라

산철쭉과 더불어 5월의 끝자락 노래하려네.

 

 

 

♧ 포구(浦口)

 

물때 맞춰 배들은

야간 조업을 나가고

 

바닷바람 쌀쌀한 포구엔

별빛도 내려오고

초승달도 내려와 출렁인다.

 

한 세대 지나

고향 찾아온 나그네

옛 선창엔 헤엄치며 놀던

어린 친구들이 보이네.

 

가로등 불빛

검은 물속에 몸부림치고

등대 전기 불빛에 쫓겨

도대불은 전설로 서 있고

 

돌아서는 나그네

긴 그림자가 흔들리네.

 

 

 

♧ 서설(瑞雪)

 

첫눈이 내리는 한라산에 오른다.

낙엽이 떠나버린 숲길엔

하늬바람이 나목에 달려들어

윙-윙- 소리쳐 우네

 

싸늘한 대기를 가르며

상서로운 하늘의 운기 품고 내리는 눈송이

주목 상록 잎새에

구상나무 마른 나뭇가지에도

하얗게 설화도 피웠나니,

 

숨을 벗어나 들판에 서니

눈구름 틈새로

조명하는 아침 햇살

백록 영봉의 검은 바위 하얀 눈

새아씨 머리띠 보석인 양 눈부시게 반짝이네

 

산야를 덮은

보드란 하얀 면사포

사각사각 고혹적인 소리

황홀한 설렘으로 안겨 오는

아무도 법치 않은 처녀지(處女地)

산바람만 휩쓸고 지나가네.

 

이제 나는

순백한 한라 설원에서

첫눈이 내뿜는 정기

내 안에 가득하기를 염원하며

순결을 범하는 떨리는 가슴 가득

깊은 발자국을 낙인하네.

 

 

 

♧ 초하 산행(初夏山行)

 

신록의 한라산이

슬며시 마음속으로 들어오면

그리움으로

온몸 설렘으로 일렁이네.

 

산길 포근한 숲 품 안에 들어서면

가슴은 활짝 열리고

맑고 푸른 싱그러운 산 내음으로

파랗게 물들어 가네.

 

산길엔 산새도 산꽃도

산등성이를 휘감아 돌아온 산바람도

흰 구름 더불어 산길을 오르고,

 

정상에 오르면,

흐르던 구름

옹기종기 오름 군락

걸어 온 들판 길 너머 수평선도

아래에서 나를 우러러보는 듯

 

너럭바위에 앉아 커피 한 잔에

번뇌도 고달픔도 타서 마시니

옛 신선이 백록과 노닐던 양

내가 구름 위에 앉아 있네!

 

 

 

♧ 5월 한라산에서

 

산을 오른다.

능선을 걷는다.

 

사제비오름

만세동산 들판

을긋불긋 캐러밴

길게 이어, 이어져 오르니

 

여기

우마 떼 한가히 울음 울던

방목장(放牧場)

 

조릿대 숲속

멧새 노래 찾아

노루 가족

숨바꼭질하고

 

선작지왓 윗세 방아오름

백록 자락 휘돌아 분홍치마 입힌

철쭉꽃 활짝 찬란한 5월 축제장에서

이 동산을 주신

거룩하신 그분께

절로 고개 숙여 감사드리네.

 

 

                                  *김충림 시집 『포구(浦口)』 (다층, 2026)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