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독거
친구와 술 한잔하고
불 꺼진 집에 들어와
문 닫고 나니
내 집이 바로 내 무덤.

♧ 처서 이후
종일 내린 비에 씻겼나
귀그물[耳網]이 성글어졌나
풀벌레 소리 투명하여
귀에 걸리지 않네
맑다 못해 외려 푸른 하늘
마음도 널어 바지랑대 곧추세우니
무더위 끝 서늘한 바람
나락 크는 소리 개가 짖는데
시를 읊지 않아도 가까이 보이고
책을 읽지 않아도 손에 잡히네.

♧ 적울積鬱
“시는 내 영혼의 멍에,
향기롭게 빛나는 미라"라고
꿈속에서 미친 듯이 소리치고 있었다
“미라야, 너를 사랑해!" 하고 말해도
명에는 벗겨지지 않고
미라의 무덤도 펼쳐지지 않았다
미라는 행간에 잠들어 있었다
나는 행간을 건너뛰면서 미라를 깨웠다
잠에서 깨어난 미라를 마구 씹기 시작했다
조미료, 방부제가 너무 많이 들어간 듯했다
질겅질겅 씹다 입술도 깨물고
꼭꼭 씹다 혓바닥도 물어뜯었다
살맛 피맛이 이럴까 하며 제멋대로 씹었다
되는 대로 씹다 뱉을 일이 아니었다
곰곰 씹어 보니 제 살맛 피맛이 아니었다
미라 속에 씹히는 돌이 있었다
그것만 뱉어내면 되는 것이었지만
가려내는 일이 만만치 않았다
꼭두새벽 밖에 나와 하늘을 보면
꺼진 영혼의 별들이 졸음에 겨워 있었다
답답한 내 미라의 파편만 같아
피마 한 마리 잡아타고 달려가고 싶었다
하늘길이 열리고 날이 밝을 때까지
환히 열린 무덤 속으로 달리고 싶었다.

♧ 난감
“오늘도 즐거운 하루가 되시기 바랍니다!"
내가?
어떻게?
“쓸쓸하지 않은 나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응?
뭐라고?
어제도 그제도 인사를 받고
오늘도 이런저런 고마운 말씀을 듣는다.
내가 어떻게 하루가 되고 나날일 수 있는가
난도 감도 못 되는 내가!
난감하네!

♧ 고독사 • 2
가는 거야
간다는 말도 없이
어디로 가는지
언제 가는지도 알지 못하고
해가 지는지
달이 뜨는지도 모른 채
꽃이 지듯이 그냥 가는 거야
별이 지듯 혼자서 가는 거야!
*홍해리 시집 『네가 찾아온 날 나는 내게 없었다』 (놀북, 2025)에서
*사진 : 제주한란전시관에서(2026. 5. 17.) *이 계절 피는 난은 석곡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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