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나무의 기억법 – 김나비
여름을 키우느라 햇살에 힘줄 돋아
물오른 초록들이 주름살 펴는 오후
꽃 피는 가지 아래 바람 줄이 수런댄다
햇살의 씨줄 뽑아 바람의 흔적 꿰맬 동안
허기진 홑마음에 일렁이는 주름의 길
부르튼 맨발을 뻗어 강물 소리 듣는다
깊이 팬 새김 줄에 한 호흡 걸어놓고
시푸른 상처 위에 매미 울음 덧칠할 때
환해진 생의 기억들, 풀 비린내 후끈하다

♧ 헌 구두의 유고 – 황현중
나의 주인은 결국 새 구두를 샀다
이제 나는 올 데까지 왔다, 다 왔다
배신의 시간,
치미는 분노의 고개를 가까스로 넘어
체념과 단념의 탄식 속에서
밤새 사전을 뒤적거려 찾아낸 낯선 말
안녕,
안녕이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도록
안녕이라 말하다 울먹이지 않도록
안녕이라는 말을 웅얼거리며 울먹이다 밤을 지새웠다
사랑 다음은 이별 아니냐
그래도 그렇지
쓸모없다고 쓸데없이 버려지는 건 옳지 않다
뒤축은 무너졌지만 아직은 성한 구두코에
음식물 찌꺼기를 걸치는 건 참을 수 없다
철수네 구두 병원에 부탁해 볼까 생각 안 한 건 아니지만
밀린 월세에 떠밀려 철수는 이미 철수했다
좋은 신발이에요
뒤축만 갈면 오래 신을 수 있다고
부드럽게 나를 쓰다듬으며
주인의 반응을 살피던 철수 생각에
무너진 뒤축이 흔들린다
번지르르하고 싱싱한 새 구두에 눈이 먼 주인이
몇 번을 망설이다 6개월 할부를 긁었을 때
하늘은 울고 나는 젖었다
주인은 나를 뒤집어 요모조모 살펴본다
제발!
재활용이라도 좋으니 나를 그곳으로 보내다오
하지만 주인의 선택은 뜻밖이 었다
퇴역한 장수처럼
은퇴한 늙은이처럼
나는 신발장 한구석을 차지하게 되었다
잠시 집행을 유예한 어둑한 시간,
불행을 겨우 모면한 다행은 그때 찾아왔다
주인은 가끔 나를 찾을 것이다
궂은날에 가끔
마트네 갈 때 질질 끌리며 가끔
새 구두를 데리고 가기에는 아까운 허름한 유랑이
나의 쓸쓸한 노후대책인 셈이다
주인의 맨발이 빠져나간 서늘한 공허,
그동안 주인이 나의 밑창에 눌러 찍은
아름다운 압화와 슬픈 탁본을 재생한다
한 짝의 기다림과 한 짝의 외로움과
그리하여 한 켤레의 고요에 이를 때까지

♧ 여명 – 정지원
붉은 해 걸려 있는 헐벗은 가지 사이
오랜 꿈 재워 두고 아득히 바라보는
저 건너 어스름 강에
부슬부슬 눈 나비
겨울도 저 스스로 인내의 불을 지펴
어두운 동녘 산에 새날을 일으키네
잘 익은 천도 한 덩이
불끈 솟는 짜릿함
깍지 낀 밤을 풀면 바람도 몸을 일어
참나무 잎새들이 고요히 시작하는
안단테 알레그로로
흔들리는 악보들

♧ 꽃이 피는 날 – 임승진
날이 포근해지니
봄이 왔나 보다
앞뜰에 뿌리내린 꽃나무
가지마다 봉오리 달고 설렌다
얼마나 기다리던 날인가?
푸르게 붙어살던 피붙이
아프게 떨어뜨리고
겨울 벌판 속에서 많이도 울었다
봄날이 절로 오던가?
언 땅에 맨발로 걸으며
태어나지 않은 꽃잎 품고
살가죽이 벗어지도록 살았다
드디어 꽃을 피우는가?
봄비 속에 숨어있던 꽃송이
고개 들고 날개 펼치는 날
쏟아지는 햇살 눈부셔도
끝없는 열망으로 비상을 한다
꿈꾸어 오던 한 세상을 위해…

♧ 녹채鹿柴 - 이화인
눈 덮인 산 능선에 걸터앉은 구름은
하늘을 유유자적 떠돌고
꽃소식은 아직 먼데 매서운 고추바람에
서둘러 지는 동백꽃
눈꽃 피는 오두막에 다삼매茶三昧에 드니
삼계의 경계조차 알 수 없어라
인생은 종착역을 모르는 긴 여정
뉘라서 저승길에 부귀영화 가져가라.
*월간 『우리詩』 5월호(통권 제455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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