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구상나무 고사목
한라산 등반 영실 코스
병풍바위 벼랑 길 북녘 들
검은 바윗돌 의지하고
하얗게 속 뼈 드러내어
하늘 향해 처연히 서 있는
구상나무 고사목 지대에 눈길이 멈추네.
실아 백 년, 죽어 백 년
태양을 향한 곧은 기상
단아한 기품으로
침엽수 중 가장 으뜸으로 사랑받아 왔느니
백록 영봉을 둘러서서
들을 가릴 듯 사철 푸르던 구상나무 군락
처참히도 고사하여
이제 한라산에서 떠나려 하는가?
인간의 탐욕으로
너무나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버린 기후변화에
자연환경은 옛 모습을 잃고
적응치 못하는 식생들 처참히 사라지는 것을 보며
산 오르는 미음 한구석에
서운한 아픔이 깊이 저려오네!

♧ 가을 산행
별빛이 하얗게 바래는 새벽
성판악 등반로
찬 기운 흐르는 돌너덜길
정상 향해 발길을 내딛네.
성산일출봉을 휘돌아 온 아침 햇살
포근히 등을 감싸 안고
백록담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정기
폐부 깊숙이 채워주네.
갈맷빛 잎 새 붉게 익어 드는 풀숲 사이로
노루 가족들 부지런히 가을을 나르고
멧새들도 등지에서 일어나
아침 사냥 분주하다.
풍성한 식욕으로 여름을 가득 먹고
파란 하늘로 치솟은 수목
겨울 문턱 앞에서
오색 빛 단풍으로 내려놓으며
소리 없는 속삭임
가볍게 살아가라 이르네.
유리알처럼 시린 하늘빛
황홀한 한라 백록 가을 정취
오늘은 흠뻑 취하여
가벼워진 몸과 맘
하산 길을 머뭇거리게 하네.

♧ 백록담 해맞이
새하안 눈 이불 포근히 덮은 한라산
정상 백록담에서 새해 일출을 맞으려
칠순을 넘긴 나이도 망각한 무모함을 감추고
자정을 넘긴 새해 새날 성판악으로 향하네.
도로는 새하얀 빙판, 길섶은 설 벽을 쌓아
체인으로 무장한 차바퀴도 힘겨워하네.
특별히 허가된 일 년 단 하루
야간 등반 코스,
전국에서 모여든 해맞이 등반객 차량
성판악 주차장을 가득 채우고도
도로 옆 주자 행렬 수백 미터 꼬리 물었다.
짙은 수묵화 그림자 속을 탐사하는 설렘 가득,
등산로 입구부터 눈을 해지는 좁은 외길
무릎 위까지 차오르는 만설(滿雪)의 길에
이어지는 캐러밴의 랜턴 불빛들이
반딧불처럼 흔들리며 흑야의 백설에 반사되어
수정 빛 광채로 황홀히 비추네.
영하 십여 도의 매운 눈보라가
나목의 가지에 매달려 부르짖는 숲의 울음소리,
아이젠에 찍히어 사각거리는 발걸음 소리,
지치고 거친 호흡소리만 어둠 속을 맴돌고
눈썹에는 얼음 송이 매달렸네.
한라산은 겨울왕국, 사방 천지 백설 나라
곱고 추한 모든 것 고요히 잠재워 적막만 흐르고
백록담은 겨울 왕관, 거대한 산머리에 쓴
신비와 장엄함이 농축된 왕관!
정상으로 칼날 바람 휘돌아
몸 가누기도 심히 버거워
가파른 얼음길을 기는 듯 구부리고 오르네.
다섯 시간의 힘든 싸움 끝에 오른 동릉 정상
동녘 하늘을 붉게 물들여가며
운해 위로 솟아오르는 새해 첫 일출의 장관!
정상에 오른 모두의 함성이 울려 퍼지네.
가슴속에 솟아오르는 뜨거운 기운
눈감고 가만히 두 손 모아 기도하네.
나라와 민족과 가족의 무사 안녕을 기원하고
마음속에 숨겨 놓은 지나온 나날의 회한들,
저 붉은 불덩이 속에 다 태워버리고
밝은 빛 가득 가슴에 품어
비우고 사는 삶 살아가기를 간절히 염원하는-.

♧ 하얀 산에서
백발의 걸음이 흰 산을 오른다.
만설(滿雪)의 한라, 깊은 침묵 속에서
세월의 무게를 가만히 품어준다.
얼어붙은 바람은
지나온 날들의 숨결
발밑에 쌓인 눈은
걸어온 길의 흔적
멈춰 선 정상에서 바라본 세상은
한없이 작고도 크다.
팔순 중반의 나이에
이 산에
이 순간에
내가 서 있다.
눈물 같은 땀이 얼굴을 타고 흐르고
한라의 품 안에서
내 삶도 녹아든다.
흰 산, 흰머리, 그리고 흰 마음으로
나는 산과 하나가 되었다.

♧ 세모(歲暮) 산행
서설(瑞雪)이 내린
한라 윗세오름에 오른다.
텃새로 자리 잡은
갈 까마귀 떼 세월을 알아채고
설게 울어대며
가는 해(年)를 아쉬워한다.
산하는 은세계
소리치며 뒹굴던 낙엽도
고요한 백설 속에 잠재우고
하늬바람은 벼린 칼날같이
앙상한 구상나무 고사목 가지에 매달려
윙- 윙- 몸부림치네.
정결한 설산에 적막만 하얗게 쌓이고
나는 하잘것없는 미물
가슴은 무겁게 일렁이고
내일 새해 첫 해가 떠오르면
그 밝은 빛을 마음 깊게 품겠네.
*김충림 시집 『포구(浦口)』 (다층, 2026)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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