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태원 공화국
그날 밤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경찰은 어디 가서 자고 있는지
공무원도 어느 곳을 산책 중이었는지
순진한 발자국만 골목마다 물밀듯이 모여들고
무정부시 해방구 해밀턴로 159엔 젊은 열정만 파도쳤다
풍랑 심한 밤바다 사공 한 사람 보이지 않고
거센 폭풍만 절벽을 때리고 있었다
일순
밀리고 떼밀리고 넘어지고 무너지고 나가넘어지고 쓰러지고
나뒤쳐지고 엎어지고 나둥그러지고 자빠지고 고꾸라지고
채이고 치이고 꺼꾸러지고 밟히고 넘어박히고 깔리고
나가떨어지고 눌리고 덮이고
“사람이 죽고 있어요. 도와주세요, 제발!"
아무리 소리쳐도 들리지 않는 절망의 세상에서
미쳐 피어보지도 못하고
낙화, 낙화, 죄없는 슬픈 꽃들이 파괴되고 있었다
산다는 게 이런 것인가
아니다 사는 게 이런 건 아니다
민심이 곧 천심이라는데
하늘 무서운 줄 모르는가
어찌 마지못한 사과만 있고 책임은 없는가
슬픔과 분노가 하늘을 찌르는데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이며, 국민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인가,
국민의 지배자인 나리들만 있는 나라에 봉사자라니?
입만 열면 욕이 튀어나오고
하얀 통곡과 시커먼 눈물이 흘러내리는
무지한 백성들은 무엇이란 말인가
내일은 해가 뜰 것인가
사랑하는 님이 오실까
아아, 정부는 어디 가고 국가는 어디 있는가!

♧ 가장 좋은 詩는 없다
아직
쓰여지지 않았으므로
언제
쓰여질지도 모르므로
누구도
쓰지 못할 것이므로
끝끝내
쓰여지지 않을 것이므로.

♧ 역린逆鱗에 대하여
내가 얼마나 작은가
나인 나와 나 아닌 나 사이
내가 나를 본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가
한평생 시를 쓴다면서, 시를 산다면서
시가 원지도 모르고
시인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고민하고 절망하고 철망에 갇히고
따뜻한 한잔의 술이 그리운 시간
밤하늘의 별들이 벌 떼처럼 잉잉거리는
오래된 미래는 이미 하늘이 아닌데
막장에서도 막상 아무것도 못하고
곱창 막장이나 구워 먹을 것인가
천사는 누구이고 악마는 어디 있는가
막시말로 시는 내게 역린인가
나의 시는 보통사람이고 싶다
검은 겨울이 길게 가지만
다시 보다가 또 다시 보라고
무던한 천년이 흐른 뒤에도
끌어안고 살아야 할, 그리워하며 살
다 썩어도 썩지 않을 부드러운 시 한편
그것이 역린이라면!

♧ 늙마 세 끼
아침엔
깨죽깨죽 깨지락깨지락!
점심은
후루룩후루룩 후룩후룩!
저녁에는
벌컥벌컥 꿀꺽꿀꺽!
망할 놈의 밥
그게 뭐라고,
날마다 세 번씩이나
괴롭히다니, 날!

♧ 나이 들어도
어머니를 생각하면
어린애가 되고,
어머니가 보고프면
강가로 나갑니다.
아버지를 떠올리면
어린이가 되고,
아버지가 그리우면
산으로 올라갑니다.
*홍해리 시집 『네가 찾아온 날 나는 내게 없었다』 (놀북, 2025)에서
*사진 : 제주 참꽃나무(수채화 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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