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뒤가 생기는 자리
관심을 간섭으로 듣는 당신
쳐 놓은 금을 건드릴 때마다
숨이 막혔어
궁금함에 중얼거리는 소리조차
견디기 힘들었지
가만히 두려는 습관은
녹슨 못처럼 박혀
서서히 벽을 쌓아 올렸어
간섭을 애정으로 받아들이는 당신
틀어진 시간은 어쩔 수 없이 입을 다물었지만
심기를 살피며
꽃을 피우려
가끔 거짓말도 했지
참아 내려는 힘과
차라리 속 편히 하라는 속삭임은
같은 숨결 속에서도 서로 섞이지 않았어
두 가지 색이 뚜렷하게 번지는 그림처럼
서로 스쳐 갈 뿐
머물지 않았어 침묵만이 맴돌았지
마치 오래된 시계의 초침이
비껴가는 것처럼
결국, 성격 차이라는 익숙한 이름으로
서로를 놓쳐 버렸어

♧ 산책하는 사이
저수지를 향해 걷던 초행길
모퉁이 집 앞에서 만난 개 한 마리
“함께 갈래?”라는 말을 눈빛으로 받아
내 곁으로 다가왔다
내 걸음이 불안한지
자동차가 다가오자
길 가운데로 나서 막아섰다
내가 옆으로 비켜서서야
제 새끼를 살피듯 돌아보고
슬그머니 물러섰다
그날 이후
멀리서 불러도 달려오는 진순이
매화 향과 개나리 빛이 번질 때에도
물새들이 발끝을 스치며 물결을 건너갈 때에도
앞장서 산책 길을 열고
내가 풍경에 머무르는 동안
다시 돌아와 기다리는 눈빛은
말보다 깊고 고요하다
함께는
거리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그 거리를 품고
서로를 지켜보는 일
진순이는 오늘도
말없이 함께 걷고 있다

♧ 배고파지는 지점
숱한 날이 답답했느냐
꽃피는 소식에도
걱정부터 앞섰느냐
벼랑 끝에서 버티던 나를 바라보다
하늘과 바다를 가리키며
“다 가져.” 선물이라고 내민 너
그 넓고 깊은 뜻까지
모두 건네주었지
그렇게 푸른빛을 고스란히 나에게 남겨 두고
쉰다섯 어느 빗물 젖은 오후
너는 소식도 없이 눈을 감았지
명랑한 빛 그대로 남은 기억은
배고픈 허기 같아
그날 돌려주지 못한 웃음을
바다와 하늘 사이에 묻는다
그 자리 그대로
사라지지 않게

♧ 자화상
십 년의 질문이
목에 걸려 숨이 막힐 때
떨리는 발끝으로 짐 가방을 끌고
하나씩 내 흔적을 지우며
바다 위로 향했다
멀리서 등대만 지켜보는 섬을 떠나
지명만 아는 낯선 곳으로
바다는 검게 잠기고
섬은 멀어졌지만
긴 그림자는 여전히 파도를 따라 흘렀다
입 밖으로 나간 말들이
속삭이듯 돌아와 귀를 스쳤지만
섬을 놓아버린 뒤
말들은 어둠 속으로 삼켜졌다
파문은 잦아들고
바다는 숨을 멈춘 듯 고요해졌다
나는 깊은 잠 속으로
천천히 가라앉았다

♧ 2월
거짓말을 하지 못해
눈 속에 녹아 버린 흰빛이 당신 같아서
버스를 타고 쫓아갔다
메마른 논 그루터기를 맴돌고
집 몇 채 붙든 산자락을 스치며
바람마저 비어 있는 정류장을 지나
오리 떼가 흩어지는 저수지를 따라 흘렀다
저물어 갈 무렵
나에게 맞는 문장을 찾지 못해
골목에서 짖어 대는 개들과
당신에게 어울리는 구절도 떠오르지 않아
아직 피지 못한 목련 봉오리들
좋은 기억과 나쁜 기억이 섞이지 않아
몰아치는 꽃샘추위 속
얼어붙은 배추밭에서 날아오르는 새 한 마리와
등글게 움츠린 고양이
당신이 없는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홍경희 시집 『울었던 자리마다 돌을 쌓으며』 (걷는사람, 2025)에서
*사진 : 요즘 한창인 약모밀(어성초)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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