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미완의 지도
파도에 밀려가는 모래처럼 무기력한 존재가 되기를 거부하고, 나는 발걸음을 멈춰 섰다. 그곳에서 얇고 질긴 내 존재의 붉은 실타래를 더듬어 갔다.
어둡고 푸르스름하게 변색되어 엉킨 매듭 앞에서 나는 기어이 깊은 날숨을 뱉어냈다. 누가 쉬이 답할 수 없는 질문들을 삼키며 밤하늘의 묵묵한 별들에게, 그리고 먼 수평선 너머 달려오는 파도에게 끊임없이 묻고 또 물었다.
“나는 대체 누구이며, 어떤 걸음으로 걸어야 하는가?
진정한 가치와 바른 태도란 대체 어떤 모습인가?”
해풍이 몽롱한 초승달을 하늘 위로 밀어 올리듯, 내 안의 금단 분홍 풍선을 바람의 꼬리에 매달아 기어이 띄워 보내고 말 것이다.
비록 수많은 시선들이 때로는 표창처럼 내 길목을 노리고, 푸른 가로수 아래 들개들처럼 짖어대며 가로막을지라도, 청춘의 나날들이 황량한 바람에 아스라이 소진되던 순간에도, 길섶의 민들레 홀씨가 저마다의 소망을 흩뿌리듯 내면의 작은 꿈들을 놓지 않았다.
내 그림자마저 흐릿한 어둠 속에 잠겨 있어도, 뱃고동이 천둥처럼 울부짖고, 달빛이 은쟁반 위를 구르던 그런 찰나에도, 오직 나를 감싸 안은 진실만을 믿으며 발자취를 따라 미완의 지도를 그렸다.
삶의 매 순간이 스스로 내린 결정으로 이뤄진다는 사실을 깨달았기에 마음 깊은 곳에서 요동치는 공포가 영혼을 삼키려 해도, 나는 그 어둠을 뚫고 일어나, 한 발, 한 발 힘겹게나마 내 길을 걸어갔다.

♧ 그녀는 럭비공
남들은 함께 가는 길을 걸어가지만, 그녀는 무거운 그림자 속에서 홀로 걸어가고 맨발로 자갈길을 걸으며 발에 걸리는 돌멩이는 걷어차 버린다.
허공에 튕겨 오른 돌멩이는 새로운 리듬을 만들어내고, 럭비공이 던져진 순간, 바람의 날개를 빌려 방향을 정하듯, 도약은 우연이 아닌, 풍향을 계산한 그녀의 비행. 허공에서 그린 포물선들은 실패의 조약돌로 쌓여 빛을 발하고, 높이 솟아오르려는 몸짓은 허공의 춤사위가 된다.
세상이 묻겠죠. “어디로 향하느냐고?"
그녀는 입가에 피워낸 미소로 답해요.
“길은 발밑에서 태어나니까.
지금 이 튀어 오름이 곧 목적지가 됩니다.”
강물의 물결 따라 흘러가다,
돌풍에 휩쓸린 것발처럼,
하늘을 가로지르는 순간-
모두가 걷던 길 위에 동동거리는 당신을 항해-
그녀는 텀블링을 하며 외친다!
“틀려도 좋아요, 두 날개가 젖어서도 날아 봤으니까요.”
오늘도 그녀의 발걸음은,
낡은 액자 속 풍경을 지워버리고,
누군가의 가슴속에 새겨진 낯선 문양이 되어-
"그리고 다음 공중제비는-
바로 당신 차례입니다!“

♧ 외로움 때문에
세상의 모든 소리 없는 움직임과
모든 이유 없는 떨림 뒤에 숨은 진실 하나,
그것은 고독-외로움이다.
호수의 달이 밤하늘에 홀로 떠 있는 것은
그림자마저 외로위서이리라
허공을 가르는 기러기의 날갯짓은
외로움을 저 멀리 쫓으려는 몸부림이다.
어둠 속을 맹렬히 달리는 기차의 경적소리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한 외침이고,
낙엽이 바람에 흩날리며 서로를 찾는 소리도
누군가의 손길 없음을 외로워하는 까닭이다.
골짜기 굽이치는 냇물소리 또한
부딪치며 홀로 흐름이 외롭기 때문이다.
바다의 파도소리는 심연의 외로움을
토해내는 아우성이다.
백사장의 조개껍질이 서로 기대어 모이는 것 또한
함께하고픈 마음이 외로움에서 비롯되었음이라
그러므로 이 세상 모든 존재는
저마다의 외로움을 품고 움직이며,
소리 내고, 모이고, 빛나니-
그것이야말로 만물의 가장 오래된, 가장 깊은 근원.
*박흥순 시집 『토끼는 발걸음을 세지 않는다』 (도서출판 서로, 2026)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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