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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허영선 시집 '법 아닌 법 앞에서'의 시(1)

by 김창집1 2026. 6. 11.

 

♧ 시인의 말

 

여기신 죽은 자와 산 자들이 만난다.

애도 받지 못한 자들의 법정

제주지방법원 201호

여기선 하늘의 사람들이 출석하고

가물거리는 핏줄들이 그들과 만난다.

울음의 움막에서 흘러나오는

그 소리들에 귀를 댄다.

제주 섬 어느 곳 어디에서나

부당하게 사랑을 빼앗긴 사람들,

사랑을 기다려온 사람들의 소리를 듣는다.

 

“우리 말 들어 봅서, 우리 말 들어 봅서"

 

우리는 누구입니까.

가슴 아래 묻어둔 기억들,

질문 속의 질문들,

 

끝도 없이 듣는다.

법 아닌 법 앞에서.

 

                                     2026년 3월에

                                               허영선

 

 

 

♧ 법 앞에서

 

법 아닌 법인 줄 몰랐습니다

죄라면

좋은 세상 꿈꾸며 속솜하지 않던 죄, 맞습니다

죄명도 기록도 모른 사람들,

풀잎처럼 이 산천 저 산천 이송되었습니다

법 아닌 법 앞에서

 

당신은 귀환하지 못했습니다

한 방에 사라졌습니다

법 아닌 법 앞에서

 

기억합니까

산이 바다에 이르듯

달이 별에게 이르듯

아가야 곧 다녀오마

마지막 숟가락 마지막 목소리 펄럭이던

바람길 바닷길 떠나서 돌아오지 않는 사람을

기억합니까

이 눌 저 재 속에서 몸부림치던

감자알 같던 허공의 사람들을

 

기억합니까

봄날에도 겨울처럼 떨며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이름 없는 어린 눈동자들을

팡팡 몰아치던 눈보라에 잡은 손 흩어지던 기억을

온 섬이 상주 없는 곡소리

상주가 될 아이들이 조문하는 섬

발굴하지 못한 뼈들의 섬입니다

어머니 아버지 부르지 못한 등뼈 휘어진 풀씨들

흐린 얼굴들 알아볼 수 있겠습니까

 

기쁘다는 말 몰랐습니다

당신의 아이가 당신 목숨 갑절도 더 넘길 때까지

슬픔도 하도 슬프면 눈물마저 숨는 법

누구는 환호할 땐 환호해야 마땅한 법이라지만

솟구치는 열광은 먼바다에 흘렸다지요

행복하면 안 되는 법인 줄 알았습니다

사랑하는 법조차 몰랐습니다

돌아서는 그 눈빛을 몰랐습니다

 

이 섬이 돌아서서 울려 합니다 울지마세요

죄라면 우는 법 푸르게 웃는 법 알았던 최

울음에도 색깔이 있던가요

사납게 찢어지던 더러운 폭포 소리, 소리들

와랑와랑 밀려오던 미친 풍경들

대체 아름다운 것은 어디 있습니까

그러니까

이 섬이 하는 말

일생 기분이 안 났습니다

 

 

누구나 당연한 건 당연하다지만 당연하지 않았습니다

홀로 편 동백이 홀로 질 때까지

꽃봄은 영영 타버린 줄 알았습니다

누구나 그러할 때 그러면 안 되는,

안 되는 게 법인 줄 알았습니다

 

서로서로 사는 법 알았습니다

한 숟가락 남겨라

남겨야 옆집으로 넘겨준단다

그래서 살았습니다

 

터질 땐 터져야 하는 법

기쁠 땐 기쁨이라 흔들리며 소송합니다

 

아침에 본 사람 저녁에 안 보이던,

사람씨 풀씨마저 안 보이던 시절

죄 없이 죄가 된, 법 아닌 법 앞의 사람들

모욕도 수치도 속수무책

법 아닌 법 앞에서

눈도 입도 다물던 사람들, 이제 한번

묻습니다 법 앞에서

 

거기 꽃 피었습니까

 

여기 꽃 피젠 헴수다*

 

 

---

*여기 꽃피려 합니다(제주어)

 

 

 

♧ 푸른 수인, 아버지

   -수형인 명부

 

보았습니다

그해 그날 날벼락 산 사람들 황당한 재판에

세상 엎는 죄 달고 형량 단 사람들

붉은 증거입니다

 

누런 보리밭 색깔 오래된 표지에

대붓으로 휘날리는 한자글 수형인 명부

사상에 저울추 달아 포박한

붓끝의 꼬리가 선득했습니다

봐선 안 될 숨겨둔 이름들처럼 그 속엔

남들 이름 가리고 드러난 아버지 있었습니다

세로줄엔 이름자 그 아래 생년월일

무시한 죄명 형량 적혔습니다

 

덜거덕 쇳소리 들렸습니다

아버지 수형인이면 수형인의 핏줄입니다

그 뜨거운 계절의 한낮

이미 상한 열아홉 청년

푸른 수인의 옷 입고 선 수인번호 1135

이제는 가고 없는 아버지 있었습니다

깊고 아득한 바람의 저편에서

 

명부엔

몸도 마음도 기울어가는 생의 꼭짓점에서

동경 공부 간 형님 어디 갔냐 하시던,

일본 가는 배 타러 갈 시간 안 되었냐고

방문 열고 조용히 목소리 짜내던,

지팡이 든 아버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명부엔

조상님 꿈꾸고

가까스로 죽음의 앞창을 풀었다는

아버지 있었습니다

 

또 하나 이 명부엔

시퍼렇게 뜬 눈초리 앞에

바들바들 떨었을 생사의 그날이 찍혔습니다

푸르른 열 손가락 지문들이 겸은 꽃잎인 듯

꾹꾹 새겨져 고향의 올레길처럼 선명합니다

 

먼 곳의 아버지 가슴에 단 수인번호

콕 낙하하며 나를 흔들었습니다

 

봐선 안 되었을 명부 이젠 죄 없으니

당당하게 열어보라

 

증거로 온 대전 발 명부입니다

 

 

 

♧ 이, 진술의 아침에

 

1

모든 진실은

스스로 회복하지 않으면 안 되 있다

내가 아는 한 그들은 그랬다

스스로에게 진술하자

결심하고 나신 날 아침

 

눈보라가 살그머니 발부리에 걸어온다

허한 가슴을 훑고 가는

눈이 내 눈을 때리고 지난다

 

돌돌 저린 기억이 눈꺼풀을 말아 올리는데

말이 나올 텐가!

순식간에 오래된 생이 위태위태한 절벽 위

자력처럼 딱 붙어 떨어지지 않는데

말이 나올 텐가!

얼어붙은 망자가

내 곁에서 지켜보고 있는 줄도 모르고

좌절의 뼈와 희망의 뼛조각이

모두 회오리바람으로 뒤섞여 온 줄도 모르고

그날 그 순간이 바람으로

나를 흔들고 있다

 

 

2

“그렇다면 내 죄는 무엇인가요?"

법정을 울리는 소리

가슴 가운데로 날아와 못처럼 박혀 버렸다

당신이 내 곁에 앉아 있는 줄도 모르고

대신 진술하려 했던 것이다

 

그제야 알았다

모래알처럼 흩어지는 목소리

여전히 당신의 슬픈 비명은 바다 밑바닥을

긁어대고 있었던 것을

소리는 날아가 젖은 수평선을 문지르고

부글대는 검은 구름 위로

사력 다해 날아 올랐다

전능한 바다가

탕탕 물 아래서 쇳소리를 내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이, 진술의 아침에

 

 

                   *허영선 시집 -4․3 법정일기- 『법 아닌 법 앞에서』 (마음의 숲, 2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