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시369 장영춘 시집 '달그락, 봄'의 시(완) ♧ 달밤 사람은 떠나가도 동백꽃만 붉게 피어 어제를 증언하듯 형형한 눈빛 하나 말갛게 고인 말씀이 댓돌 위에 놓여있다 퍼렇게 가슴 저린 시간 속을 빠져나와 푸른 이끼 골목길에 담쟁이 뻗어나고 성읍리 조몽구 생가 하늬바람 세 들어 살던 달밤이면 별이 된 아이들이 내려와 마당 한가득 초롱초롱 촛불 켜고 골목길 어귀에 앉아 아버지를 기다린다 오늘도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절규하듯 빈 항아리 한숨들 새 나가고 지붕 위 하얀 달그림자 지문처럼 찍혀 있는 ♧ 팽목항에서 미안하다, 미안하다 고개를 떨구다 본 어느새 바다를 지운 아이들이 웃는다 종이배 출렁거리며 섬 하나를 건넌다 ♧ 도문에 말하다 폭염 속 푸른 꿈 찾아 여기까지 왔습니다 연길 거.. 2024. 11. 9. 월간 '우리詩' 11월호의 시(1) ♧ 플라스틱 감정 - 최경은 조각들이 쌓인다 나노플라스틱, 눈에 보이지 않는 입자들 조각들은 바쁘다 무한하다 은밀하다 플라스틱처럼 유해한 나를 나는 찾고 있다 나는 왜 유해한가 분노조절 안 되는 폭발적인 감정 외톨이라는 감정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지 않는 무기력을 낳는다 누구에게도 도움 안 된다는 생각이 닿는다 자존감이 움츠러든다 강박 속에 숨어 있으니 감정이 없는 플라스틱처럼 기분이 딱딱해진다 플라스틱처럼 되고 싶은 생각이 밀려온다 감정을 지우고 또 지운다 새들이 추락하고 고래가 떠오른다 감정은 없어도 흔적이 남는구나 더 많이 자잘해져서 사라지기 전에 나 여기 있어요, 소리친다 ♧ 바람꽃 - 한명희 넌.. 2024. 11. 8. 김윤숙 시집 '저 파랑을 너에게 줄 것이다'의 시(11) ♧ 화성, 어디쯤에 이르러 어느 하늘 아래 그림자 깊어지나 벽과 벽 사이 천 길 벼랑 갈라놓았던 빈 틈새 알아챘을까, 두려움 깊었을까 파란만장 나부끼는 아비의 길을 밝혀 행궁의 길 이르러 뜨거운 맨발이거나 흙바닥 낮게 엎드린 백성의 미음이거나 품에 든 아들로 하루여도 오죽 좋았을 간절히 부르는 노래 온 세상이 받들어 그 이름 성군이라 답하는 초록 숲 그늘 짙다 ♧ 반가사유상 텅 비어 흐르는 몸 어디쯤에 임하시나 그윽이 바라보는 무한 우주 티끌 하나 입가에 맴도는 미소 사람이라, 사랑이라 ♧ 작은 신 운동화는 넉넉히 너를 향한 발걸음에 어찌해 빛나는 길, 되레 멀리한 구두는 가만히 돌.. 2024. 11. 6. 조직형 시집 '천 개의 질문'의 시(9) ♧ 종이 인형 이미 북촌을 걷고 있었다 같이 걷던 발걸음이 거기에 기다리고 있는 듯 골목에서, 달력 그림처럼 한옥 처마의 곡선을 사진에 담았다 거기에 서 있는 누군가가 함께 찍혀 나올 것 같아서 길게 줄을 서서 국수를 먹으면 거기에 같이 기다린 사람이 서 있을 것 같아서 먼 곳에 있는 추억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들을 찾아다녔다 우리가 언제 함께했는지 기억을 의심하면서 마주 닿은 가슴이 포개진 적이 언제였는지 사실은 그렇듯 하 며마 보다 꿈속에 보는 것들은 늘 한 면만 본다 닫힌 대문에 걸린 종이 인형 오늘은 쉽니다 모든 것은 그 안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 외국어의 시간 날개를 접고 시나브로 시간의 그물을 엮고 있다가 .. 2024. 11. 4. 월간 '우리詩' 10월호의 시(6)와 억새 ♧ 새벽 운동 사선으로 날아드는 화살촉 햇살이 어설픈 어둠을 털어 내는 나의 새벽은 하루치의 보험료를 납부하는 경건한 시간 푹푹 찌는 한증막과 냉혹한 한파에도 거를 수 없는 내 보험료의 질료는 심연의 잠을 들어 올리는 수고로움과 무덤처럼 널브러진 근육과 혈액의 에테르를 소환하여 궁극의 인내와 숨결의 절박함을 격발시키는 것, 깊숙이 파고드는 신성한 공기를 아이처럼 맞이하는 것 질병과 고통을 필요로 하지 않는 나의 보험금은 실존하는 평안과 시들지 않는 내일이다 ♧ 개, 소리 - 이영란 이름은 모르지만 그는 분명 개다 어느 날 엘리베이터에서 나를 빤히 쳐다봤다 눈을 마주치기 싫어 고개를 돌렸다 거울 속에는 늙은 개가 입.. 2024. 11. 3. 안상근 시집 '하늘 반 나 반'의 시(2) ♧ 봄이잖아요 두툼한 외투 호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고개 숙인 채 걷고 있노라니 여기저기서 소리가 새어나온다 ‘봄이잖아요’ 꽃집 유리창 너머로 무더기 안개초가 손을 흔들고 노란 프리지어도 웃어 보이고 수선화도 작년처럼 그대로 있었다 호주머니에서 손을 빼고 고개 들어 하늘과 반기는 꽃들을 보며 혼자 중얼거린다 ‘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 고사리 우뚝 서서 쳐다볼 때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 풀썩 주저앉았을 때에야 탄식처럼 너를 만났다 내가 낮아져서야 비로소 네가 보였다 오므린 작은 손으로 대지를 뚫고 나은 네가 빛처럼 거기에 있었다 ♧ 똥 똥이 더럽지 않다면 그건 사랑이다 똥을 보고도 피하지 않는다면.. 2024. 11. 2. 이전 1 2 3 4 ··· 6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