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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369

조직형 시집 '천 개의 질문'의 시(8) ♧ 강은 흘러가면서 깊은 여백을 남겨두었다*    슬픔의 등이 깨지는 하루 외롭지 않으려고 나는 강으로 간다 생각하지 않으면 슬픔은 눈물이 없을 수 있다   전에는 보지 못한, 어쩐지 강가에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해당화가 피었다 꽃이 피고서야 거기 있는 줄 알았다 장미를 생각나게 하는 향기가 슬픔으로 배이다 가만히 꽃잎을 만진다. 입술 같은   아무리 먹어도 채워지지 않는, 그리움은 허기 펄럭이는 것들을 강물에 흘려보내려고 그러나 아무것도 흘려보내지 못하고 강가에 주저앉는다   강을 떠미는 바람은 물비늘을 만들고 나날이 억세지는 갈대나 간간이 웃고 있는 애기똥풀 갑자기 치렁치렁 주머니를 늘어뜨리는 아카시아 무성하기 위해 아우성친다   강에는 가만히 강다운 것들.. 2024. 10. 25.
김항신 시집 '연서戀書'의 시(완) ♧ 연서     -아버지의 딸     아버지, 내가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 돌담과 흙으로 집을 짓고 아버지 나를 보듬던 세월 한 5년, 짧은 세월이지만 새록새록 떠오르는 추억들, 지금까지 그 추억 먹으며 살고 있답니다.   아버지 생각나시나요. 큰아버지와 식사하던 날, 아버지 무릎에 앉아 큰아버지 수저 입으로 들어가는 모습 쳐다보던 기억, 그리고 사촌 오라버니 불러다 아버지가 글 가르쳐 주던 모습, 태둥이로 약하게 태어나 바람에 날아갈까 걷다가 무릎 까질세라 애면글면 하며 보듬어 주시던. 또 어느 날에는 동생 등에 업고 내 손잡아 밭일 가신 어머니 기다리며, 마당 앞 올레에서 원당봉 자락에 살레칭 ᄎᆞᆷ웨 밧 서리꾼 다울리던 아버지 목소리. 언제는 굴묵에서 키우던 어미닭 한 마리 잡아 닭백숙 만들어.. 2024. 10. 24.
월간 '우리詩' 10월호의 시(3) ♧ 조지아 아가씨 – 이산    그녀의 말은 천둥처럼 묵직했고 눈빛은 번개처럼 단호했다.   “나는 러시아어를 몰라요. 영어로 말하세요!”   패전의 대가로 조국 남오세티야 영토 안의 적군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견고한 증오가 묻어났다   빼곡히 둘러싼 선반 위 wine 또한 붉은 피를 토하고 하안 거품을 물며 격렬히 외쳤다   한 병의 wine을 팔지 못할지언정 결코 내놓을 수 없는 조국이다   사관생도처럼 신성한 그녀의 가슴에는   코카서스는 있지만, 캅카스는 없고 조지아에는 그루지야가 없다     ♧ 충전 - 이영란      40일째 잠을 자지 못한 a는 잠자는 것을 잊어버렸다 a의 뇌에서는 회의가 시작되었다 앞으로도 잠자는 것을 기억하지 맙시다 머릿속에 쌓여.. 2024. 10. 23.
계간 '제주작가' 2024 가을호의 시(2) [특집 : 4.16 추모작품]  ♧ 풍랑경보가 내려진 아침 - 김수열    1  선체수색이 마무리되고 있는 지금, 저희들은 비통하고 힘들지만 이제 가족을 가슴에 묻기로 했습니다  너무나 아픈 시간이었기에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두렵기만 합니다  이런 아픔은 우리들로 끝났으면 합니다  미수습자 5명의 이름을 잊지 말아주십시오   기타 잘 치고 음악 좋아했던 남현철 군  운동 잘해 체대 진학이 꿈이었던 박영인 군  구명조끼 벗어 학생에게 주고 다시 배 안으로 들어가신 양승진 선생님  감귤농사 꿈을 안고 제주로 가던 권재근 씨, 일곱 살 아들 혁규 군    2  세월호가 침몰한 지 1311일의 기다림 끝에 유가족들은 목포신항을 떠났다  풍랑경보가 내려진 아침이었다                     .. 2024. 10. 22.
월간 '우리詩' 10월호의 시(2) ♧ 치자 꽃 – 도경회    다 잊은 줄 알았던 당신 살 내음 눈을 감아야 만져지는 향훈은 희고 매끄러운 살결에 부드러웠다   조용하고 포근한 설레임 아름 가득 안기는 저 큰 달 흰옷에서 강 냄새가 난다   다시금 바람은 고요히 불고 시간의 흐름조차 잊을 만큼 향을 피우고 있다 끝임*이 고운 미소가 아련하다 그리움 같은   --- *첫사랑, 또는 그리워하는 사람을 뜻하는 경남 방언.     ♧ 눈물방울에 핀 꽃 – 방순미   꽃잎 다투어 피고 지는 봄 세상에 꽃 아닌 게 어디 있을까   삶도 그러리라   젖은 흙 한 삽 덮고 산에서 내려와   집 뜰 수척하게 핀 수선화 마주 앉았을 뿐인데 눈물이 앞선다   눈물방울에 비친 아흔아흡 송이 꽃 당신께 바칩니다 .. 2024. 10. 20.
안상근 시집 '하늘 반 나 반'의 시(1) ♧ 시인의 말   벌꿀색 햇살이 스며드는 수년 전 가을 어느 날 오일장 좌판 옆에 앉은 두 촌로의 대화 가족의 삶은, 세 번째 시집 『한 컷 제주 100』 (33)에   농사일 얘기를 이번 시집 『하늘 반 나 반』의 제호로 쓴다.   기어코 덤으로 주는 호박 한 덩이 그저 나도 호박 한 덩이가 되고 싶다.     2024년 9월 안상근     ♧ 하늘 반 나 반  기어코 호박 한 덩이를 덤으로 준다 한 해 동안 수고로움 애써 나누는 게 하늘 덕분이라 외치며 두 손 모은 촌로 농사란 게 나만 한 게 아니란다   하늘 반 나 반     ♧ 상춘(賞春)     하늘빛 산빛 사이 물빛에 비친 것은 겨울 민낯 거두오고 드리워진 사월 화관(花冠)   낯선 풍경 담은.. 2024. 10.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