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570 월간 '우리詩' 4월호의 시(1) ♧ 상강 – 박소원 내가 서울로 떠날 때, 할머니는 마을회관 앞 정류장까지 배웅 나오셨다 시월 북풍에 파랗게 익었던 하늘 김장배추 포기마다 푸릇푸릇 흡입되고 동쪽 하늘 낮달 무밭 두렁마다 사각사각 서리로 내린다 ♧ 바람의 세월 - 洪海里 뒤돌아보면 바람은 늘 한 쪽으로만 불었다 내가 하기보다 네가 하기를 바랐고 내가 해 주기보다 네가 해 주기만 원했다 그러다 보니 바람 부는 날 가루 팔러 다니며 바람을 잡아매려 하고 그림자를 잡으려 들기 일쑤였다 바람 따라 돛도 달고 바람 보고 침도 뱉으랬거늘 바람벽에 돌이나 붙이려 했으니 어찌 바람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으랴 바람 안 부는 곳이 없고 바람 앞의 .. 2025. 4. 12. 김병택 시집 '아득한 상실'의 시(10) ♧ 설경놀이 얼어붙은 새벽의 이 눈길을 지나간 흔적이 하나도 없었다 한층 더 은밀해진 숲길을 따라 스틱으로 공기를 차례로 누르며 앞으로 더 걸어간 지점에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나무들이 엄숙하게 서 있었다 지나온 날을 대충 한데 묶어 만든 긴 이야기를 자세히 늘어놓는 것이 나무들의 한결같은 계획인 듯했지만 이런 이야기든, 저런 이야기든 사연을 오롯이 간직한 가슴에다 새 이야기를 볍씨 뿌리듯 흩뿌리면 세상사도 다시 싹을 기위 올릴 터였다 시간이 흘러도 설경놀이 온 사람들은 으 돋우느라 왁자지껄하기만 할 뿐 나무들의 이야기에는 귀를 막았다 설령, 비가 내리고 가지 위에 쌓인 이야기들이 한꺼번에 사라진다 해도 그것을 아쉬워할 필요는 없었다 머.. 2025. 4. 11. 김수열 시집 '날혼'의 시(4) ♧ 검등여* 추자섬 앞바다 바위 검어 검등여 만삭 해녀 배 타고 물질 가다 갑자기 산기 느껴 돌아가기엔 너무 멀어 검등여에 배 대고 동료 해녀들 손빌려 순산을 했다는데 검등여라 그랬는지 검지도 않은데 한평생 검둥이라는 별명 달고 살았다 ---*검등여 : 추자도 앞바다에 있는 여. ♧ 저녁노을 몰래 깨 팔아 동네 처자 원피스 사준 건 결혼 전 일이고 밭 칠십 마지기 있다고 삥 쳐서 지금 할망 만나 머리 올리고 오십 년 넘게 살면서 빤스 한 장 손수건 한 장 받아본 적 없다며 잔솔가지 모질게 분질러 대는 할망한테, 이 몸이 귀한 선물인디 뭔 놈의 선물이 더 필요하냐며 저녁노을 모퉁이 돌아 스리슬쩍 사라지는 하르방 뒤통수에 붉으락푸르락 웨자기며 .. 2025. 4. 10. 아라동 4․3길 1코스(2) □ 많은 사연을 안고 있는 설새미 샘은 주변에 부지정리를 하면서 지금은 시멘트 구조물로 남아 있다. 수도가 들어오기 전까지 사용한 흔적이 보인다. 주둔소가 이곳에 들어온 것은 이 샘물을 사용할 수 있어서였다. 1948년 6월 초, 일부 군인들이 입산하면서부터 미군정에게 경원시 당하던 모슬포 9연대 소속 11연대 1대대는 제주농업학교 연대본부를 거쳐 이곳 설새미에 주둔하게 된다. 당초 죽성부대는 기존 9연대의 제주병력으로 이루어진 부대로 토벌작전 및 무기보급 등에서 차별을 받았다고 하며, 사실상 외딴곳에 격리조치된 거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어쨌든 군인들이 이곳 설새미에 주둔하기 시작하면서 오등리와 아라리 등 주변마을의 희생도 컸다. 죽성에 살던 한 주민은 잡혀간 사위를 빼내기 위해 황소까지 이.. 2025. 4. 9. 아라동 4․3길 1코스(1) □ 산천단에서 시작되는 1코스 제77주년 4․3 추념식이 얼마 안 남은 시점에서 아라동 4․3길을 걷기로 했다. 이번 추념식 슬로건은 전국적으로 모집해서 당선된 ‘4․3의 숨결은 역사로, 평화의 물결은 세계로!’라는데, 그에 맞춰 4․3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아라동 4․3길은 두 코스로 나누어져 있다. 1코스는 산천단에서 문형순 경찰서장의 묘지터, 설새미주둔소, 죽성마을, 제주양씨 열녀비, 인다 4․3성, 박성내 등을 거치는 8.3km 구간으로 약 2시간이 소요된다. 2코스는 4․3때 큰 피해를 입은 관음사에서 진지동굴, 동세미, 불칸낭, 월평 4․3성, 2연대 군인전사자 추모비, 조록나무를 거쳐 영평상동 마을회관에 이르는 9km 구간으로 2시간 3.. 2025. 4. 8. 월간 '우리詩' 3월호의 시(완) ♧ 추앙과 추락 사이 – 권순자 허공과 허공을 이은 막대에 발을 올린다 지렛대 끝 가벼운 몸이 가벼운 말을 따라 솟구친다 희미하고 어른거리는 자태 빛깔의 오색 찬란히 눈부시다 일거수일투족에 환호하는 손바닥들 목소리는 안개 속을 굴러다니고 메아리치는 ♧ 탈출 풍경(흔들리는 풍경) - 지소영 너의 별을 수호하지 못했다 오만한 점령 황금이 불탄다 노란 엑기스 바다로 침투한다 오렌지로 이탈한 하늘은 녹아 투명 수정체를 위협하며 고양이 발톱처럼 긁어대고 있다 아름다웠던 캔바스에 어둠의 데칼코마니 화성과 지구는 스스로 본연의 역사를 지우고 있다 외면당한 수성의 푸른 눈물 퍼시픽 팰리세이즈*에는 검은 사랑의 표고들이 풍경을 바꾸고 있다 .. 2025. 4. 7. 이전 1 2 3 4 ··· 95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