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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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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자 시조집 '봄비에 썼던 문장은 돌아오지 않는다'(완) ♧ 까마중    도두봉 갔다 오다 잠시 멈춘 걸음에   까맣게 익은 아이 날 보며 웃고 있데   잡힐 듯 말 듯한 시절 아련히 다가왔네   까마중, 얼마나 순도 높은 빛깔이었나   목마름 깊을수록 최대치로 끌어 모아   한입에 밀어 넘기면 배냇짓처럼 얹힌 단물     ♧ 고봉밥    아들 밥 뜰 때마다 그 말씀 생각난다 사람은 밥심으로 살아가는 거라며 사발꽃* 수북이 피듯 고봉밥 떠 주셨지   비수로 꽂힌 말도 누르면 지나는 것 쉰다섯 혹은 여섯 내 삶의 급커브길 꾸욱꾹 눌러 담아야지 세상 실은 고봉밥   --- * 사발꽃 : ‘수국’의 제주어.     ♧ 부끄럽다    당산봉 아버지 산소   옆에서 늘 지키는   등 굽은 소나무에게 .. 2024. 9. 18.
김항신 시집 '연서戀書'의 시(6) ♧ 외로운 여정 3    -해안 길 걸으며    병명도 애매모호 하다는 의사의 진단 지치고 아픈 심사   바다를 끌며 올라오는 멸치나 무상함에 걷는 그녀나   매운바람에 일렁이어 천방지축 밀려든 은빛 물결들 컨테이너 화관에 몸담고 끌려가는 모습은 바다가 내어 주는 생멸 세월 따라 유영하던 너희 꿈은 어디서부터였을까   모호하게 꿈결 속 누비다 빠져나오는 붉은 돌기들의 아우성 세월 따라 잠복하던 너희 꿈은 어디서부터일까   몸이 내어주는 생멸인 대상을 포진하던     ♧ 접시꽃 당신    수탉과 접시꽃의 ‘합의 일체’ 오매불망 소원하던 하안 꽃송이   순애보처럼 파노라마 되던 날 정이가 잉태되고 오라비는 유실됐다 민이가 아들이길 소망하듯 위로하던 날   .. 2024. 9. 17.
충주호(청풍호)의 사계 2024. 9. 16.
계간 '제주작가' 여름호의 시(6) ♧ 늙은 작가의 노래 - 강덕환    자기가 본 것, 아는 것만 진리라고 여기며 무리를 지어 장르, 동문, 성씨, 고향 성향단위로 조직을 만들고 여기에 금일봉을 쾌척하여 대표 자리를 맡아 명함에 새겨 선거 때마다 흥정하며 보조금, 광고에 골몰한다   등단연도나 매체를 따져 이러쿵저러쿵 대접받기를 원하고 중앙문단이 어떻다거나 유명 작가와의 인연을 자기 작품의 질과 동일시한다   발표한 작품 권수와 수상경력은 기를 쓰고 프로필에 꼭 집어넣으려하고 다 그런 건 아니라며 시치미를 때는 걸 보면 나 또한 늙었나보다     ♧ 사과나무 이야기 - 강동완     우리집 뒤뜰에는 사과나무 한그루가 외롭게 심어져 있어 노을이 지는 저녁 사과나무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어둠 속에서 눈물이.. 2024. 9. 15.
조직형 시집 '천 개의 질문'의 시(3) ♧ 긴기아    4월은 한참 멀었는데 겨울이 너무 길었던 걸까 긴기아, 아직은 아닌데 너무 서둘러 꽃대를 밀고 올라와 버린 조급함을 이쩌지 제 계절을 분별하지 못하고 피는 꽃이 어쩌면 좀 부족한 거 같기도 한데   지루한 시간을 확 잡아당겨 하루를 열두 시간으로 한대도 누가 뭐라겠어 아무려면 그것도 너인 걸   애써 봉오리를 밀어 올려도 다 피지 못하는 꽃이 있고 너무 미리 와서 녹아내리는 꽃도 있다   일찍 피려는 마음과 피지 못하는 마음 사이에서 우리는 피어나고 창가의 햇볕은 피지 못하고 움츠린 봉오리로 간다   초대받지 못한 자리에 미리 와 조그맣게 웃고 있는 꽃을 나의 봄 마당으로 불러들인다, 긴기아     ♧ 불빛 정원    목련나무 입구, 아무 계절도.. 2024. 9. 14.
김윤숙 시집 '저 파랑을 너에게 줄 것이다'의 시(5) ♧ 장무상망長毋相忘    바위는 바위끼리 나무는 나무끼리   겹겹이 단을 쌓아 휘는 바람 붙들었다   먼 해역 밀려드는 파도, 닿지 않는 소식에   때로는 쓸쓸함이 등살처럼 돋아나고   머뭇대던 의중에 때 이른 수선의 향기   마스크 한 겹 가려도 심중으로 스미던   단산 기려 놓는 걸음, 한 획 길게 내리며   붓끝에 얹힌 너에게 간절함을 전하는   첫 마음 그대로겠지, 산그늘에 스미다     ♧ 출륙금지령     칠흑의 바다 위로 그림자 짙어진다     살길 찾아 나선 뱃길은 안전했을까 금줄 같은 수평선 제주사람 발 묶어둔 감옥 같은 이백여 년 천형의 생을 더해, 군마 전복 해삼 감자 당금귤 한 알에도 매겨지던 세금폭탄, 수탈의 죄를 물어 바람은 쉬지 않고 그토록 몰아.. 2024. 9.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