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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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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춘 시집 '달그락, 봄'의 시(완) ♧ 달밤    사람은 떠나가도 동백꽃만 붉게 피어   어제를 증언하듯 형형한 눈빛 하나 말갛게 고인 말씀이 댓돌 위에 놓여있다   퍼렇게 가슴 저린 시간 속을 빠져나와 푸른 이끼 골목길에 담쟁이 뻗어나고 성읍리 조몽구 생가 하늬바람 세 들어 살던   달밤이면 별이 된 아이들이 내려와 마당 한가득 초롱초롱 촛불 켜고 골목길 어귀에 앉아 아버지를 기다린다   오늘도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절규하듯 빈 항아리 한숨들 새 나가고 지붕 위 하얀 달그림자 지문처럼 찍혀 있는    ♧ 팽목항에서  미안하다, 미안하다 고개를 떨구다 본 어느새 바다를 지운 아이들이 웃는다 종이배 출렁거리며 섬 하나를 건넌다   ♧ 도문에 말하다    폭염 속 푸른 꿈 찾아 여기까지 왔습니다 연길 거.. 2024. 11. 9.
월간 '우리詩' 11월호의 시(1) ♧ 플라스틱 감정 - 최경은    조각들이 쌓인다 나노플라스틱, 눈에 보이지 않는 입자들   조각들은 바쁘다 무한하다 은밀하다   플라스틱처럼 유해한 나를 나는 찾고 있다 나는 왜 유해한가   분노조절 안 되는 폭발적인 감정 외톨이라는 감정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지 않는 무기력을 낳는다   누구에게도 도움 안 된다는 생각이 닿는다 자존감이 움츠러든다   강박 속에 숨어 있으니 감정이 없는 플라스틱처럼 기분이 딱딱해진다 플라스틱처럼 되고 싶은 생각이 밀려온다   감정을 지우고 또 지운다 새들이 추락하고 고래가 떠오른다 감정은 없어도 흔적이 남는구나   더 많이 자잘해져서 사라지기 전에   나 여기 있어요, 소리친다     ♧ 바람꽃 - 한명희    넌.. 2024. 11. 8.
제주4․3 '76주년 추념시집'의 시(2) ♧ 어느 먼나무로부터 – 고영서   꽃의 기억은 없었다   이중섭미술관에서 내려오던 길 삼삼오오 걷던 우리는 먼발치에서도 한눈에 알아봤다 면사무소가 읍사무소가 되고 시청이 되고 자치 경찰대가 된 마당에 한라산에서 옮겨와 뿌리를 내린 나무 한 그루 국군 2연대 1대대가 주둔할 때 무장대 토벌을 마친 기념으로 심어진, 나무로는 드물게 벼슬까지 오른 먹낭 개먹낭, 생명에 좌우가 어디 있나 너무 많은 열매를 지탱하느라 가지가 휘었다 벤치에 엉덩이를 걸치고 우리는 영 살았수다 오래 살아줍서 먼나무 꽃말은 기쁜 소식이라며     ♧ 사라지는 사람들 - 고영숙    섬에 걸어 놓은 수평선을 접었지   접힌 자국마다 그늘진 절벽이 되는데   수직의 몸들이 경사면으로 기울어.. 2024. 11. 7.
김윤숙 시집 '저 파랑을 너에게 줄 것이다'의 시(11) ♧ 화성, 어디쯤에 이르러    어느 하늘 아래 그림자 깊어지나   벽과 벽 사이 천 길 벼랑 갈라놓았던   빈 틈새 알아챘을까, 두려움 깊었을까   파란만장 나부끼는 아비의 길을 밝혀   행궁의 길 이르러 뜨거운 맨발이거나   흙바닥 낮게 엎드린 백성의 미음이거나   품에 든 아들로 하루여도 오죽 좋았을   간절히 부르는 노래 온 세상이 받들어   그 이름 성군이라 답하는 초록 숲 그늘 짙다     ♧ 반가사유상    텅 비어 흐르는 몸   어디쯤에 임하시나   그윽이 바라보는 무한 우주 티끌 하나   입가에 맴도는 미소   사람이라, 사랑이라     ♧ 작은 신    운동화는 넉넉히 너를 향한 발걸음에 어찌해 빛나는 길, 되레 멀리한 구두는 가만히 돌.. 2024. 11. 6.
계간 '제주작가' 가을호의 시(4) [특집: 4․16, 그날을 기억하다]    ♧ 슬픈 안부 - 양동림    누나 배가 이상해. 쿵 소리 났어… 누나 사랑해. 그동안 못 해줘서 미안해. 엄마한테도 전해줘. 사랑해. 3G도 잘 안 터져. 나 아빠한테 간다.   4월 16일 오전 9시 35분에 발송된 문자에 답한 사랑한다는 메시지는 언제쯤 도착할까?   멀리 떨어진 남해안의 심에서 바다를 향해 보내는 사랑한다는 메시지는 10년 동안이나 열어보지 못한 채 쌓이고 쌓여 해마다 돌아오는 4월 바짝 졸아든 미역국이 너무 짜다  --- *세월호 희생자 단원고 학생의 마지막 문자     ♧ 빗줄기의 힘 – 양순진    -팽목항 세월호 앞에서    팽목항에 눈 감지 못하는 저녁들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풋내 나던 아이들 꿈의 .. 2024. 11. 5.
조직형 시집 '천 개의 질문'의 시(9) ♧ 종이 인형    이미 북촌을 걷고 있었다   같이 걷던 발걸음이 거기에 기다리고 있는 듯 골목에서, 달력 그림처럼 한옥 처마의 곡선을 사진에 담았다 거기에 서 있는 누군가가 함께 찍혀 나올 것 같아서   길게 줄을 서서 국수를 먹으면 거기에 같이 기다린 사람이 서 있을 것 같아서   먼 곳에 있는 추억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들을 찾아다녔다 우리가 언제 함께했는지 기억을 의심하면서   마주 닿은 가슴이 포개진 적이 언제였는지 사실은 그렇듯 하 며마 보다 꿈속에 보는 것들은 늘 한 면만 본다   닫힌 대문에 걸린 종이 인형 오늘은 쉽니다   모든 것은 그 안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 외국어의 시간    날개를 접고 시나브로 시간의 그물을 엮고 있다가 .. 2024. 11.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