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지랑이
천왕봉 아슴히 보이는 남녘 섬(島) 어디
입 하나 줄이느라 보퉁이 하나 달랑 쥐어 보낸
약초꾼 하씨 둘째 딸아이
그도 이젠 마흔이 넘어
검게 그을린 얼굴에 자식 데리고
외팔이 제 아비 봄날 캐던 족도리풀* 대신
아지랑이 산불처럼 번지는
사량도** 개펄에서 바지락을 캐겠지
그 아지랑이 이글이글 그리움 불을 당겨
헐떡이며 헐떡이며 단숨에 원지*** 삼거리 덕산 장터 돌아
천삼백 고지 샘텃가 살얼음을 풀었다
이 산자락 저 골짝 입 있어도 말 못한 서러움 넋들
옹기종기 양지녘에 불러 곰취싹 제비꽃 얼레지로 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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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도리풀 - 뿌리를 거담제로 쓰는, 세신(細辛)이라는 한방의 약재. 봄에 피는 꽃이 꼭 족도리 마냥 생겼다.
**사량도 - 경남 삼천포 앞의 섬, 지리산이 아슴히 보인다 해서 지리망산이라는 산이 있다.
***원지 - 진주 산청간 국도상의 동부 지리산 초입의 삼거리.
♧ 봄비 오는 날
애태우던 겨울 가뭄
우수지나 경칩에서야
내리 사흘 비가 온다
눅눅한 민 씨(閔氏) 골방
이태 묵었다 바닥 난 마가목술에
안개는, 골골의 설화(說話)처럼 깃들어
기다려야 올 사람 없는 첩첩 산중
이렇게 추적추적 비오는 날은
누군들 지나온 산길 다 그립지 않으랴
나이 들어 적적하다는 것 이런 것일까
이제, 놀랍도록 꽃들이 피고
세상 쓸쓸함은 사라지겠지만
휘적휘적, 청승맞게
오늘은 마실이나 갈거나
♧ 춘우春雨
아픔이 저리도 아름답구나
쓰려다 쓰려다 남겨 논
마지막 연서(戀書), 얼룩진 여백으로
조개골 산목련이 진다
누군들 강이 되고 싶지 않으리
머무는 듯 흘러
먼 바다 가 닿고 싶지 않으리
여울목 미어짐도 그 무엇도
이제는 꼭꼭 품고 갈
속 깊은 강물일 사람아
다리쉼하는 나루 날은 저물어
꽃 진 자리 쓰리고 쓰린
내게는 아직도 아픔이기에
산목련 지는 날은 겨울보다 더 춥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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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목련 : 함박꽃.
♧ 봄비
정 많아 쉬 흔하시던 눈물
총총 거두어 밤길 잡아 가신 그곳에
칭얼대는 쉰둥이
홀앗이로 넘던 보릿고개
차마 있으라구요
꽃샘 잎샘 차마 있을라구요
쉰이 다 되어 풀석이는
내 영혼의 회갈색 메마른 산비알
촉촉히 적시는 저 영롱한
시(詩)의 방울 같은 봄비가
당신 먼 나라에서 보내오신,
꽃다운 젊은 날의 그 흔하시던 눈물
정녕 아닐 테지요
번지는 연두빛 어룽어룽
산이 어린애마냥 조잘댑니다
♧ 먼동
바람이 어둠을 흔들어 깨우면
돌아 서서 흐느끼는 신갈 숲
절름발이 피투성이 서러운 반쪽의 봄
아서라 그 아픔 누가 모르랴
그저 모든 것을 위해
안으로 안으로 삭혀야 할 뿐
먼동이 트고
무제치기 무지개가 걸리면
온 산 흐드러질 진달래 울음
* 권경업 시집 『자작 숲 움틀 무렵』 -지리산 치밭목(명상, 1999)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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