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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권경업 시집 '자작 숲 움틀 무렵'의 봄 시편

by 김창집1 2024. 4. 10.

*족도리풀

 

 

아지랑이

 

 

천왕봉 아슴히 보이는 남녘 섬() 어디

입 하나 줄이느라 보퉁이 하나 달랑 쥐어 보낸

약초꾼 하씨 둘째 딸아이

그도 이젠 마흔이 넘어

검게 그을린 얼굴에 자식 데리고

외팔이 제 아비 봄날 캐던 족도리풀* 대신

아지랑이 산불처럼 번지는

사량도** 개펄에서 바지락을 캐겠지

 

그 아지랑이 이글이글 그리움 불을 당겨

헐떡이며 헐떡이며 단숨에 원지*** 삼거리 덕산 장터 돌아

천삼백 고지 샘텃가 살얼음을 풀었다

이 산자락 저 골짝 입 있어도 말 못한 서러움 넋들

옹기종기 양지녘에 불러 곰취싹 제비꽃 얼레지로 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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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도리풀 - 뿌리를 거담제로 쓰는, 세신(細辛)이라는 한방의 약재. 봄에 피는 꽃이 꼭 족도리 마냥 생겼다.

**사량도 - 경남 삼천포 앞의 섬, 지리산이 아슴히 보인다 해서 지리망산이라는 산이 있다.

***원지 - 진주 산청간 국도상의 동부 지리산 초입의 삼거리.

 

 

*변산바람꽃


 

봄비 오는 날

 

 

애태우던 겨울 가뭄

우수지나 경칩에서야

내리 사흘 비가 온다

 

눅눅한 민 씨(閔氏) 골방

이태 묵었다 바닥 난 마가목술에

안개는, 골골의 설화(說話)처럼 깃들어

기다려야 올 사람 없는 첩첩 산중

이렇게 추적추적 비오는 날은

누군들 지나온 산길 다 그립지 않으랴

나이 들어 적적하다는 것 이런 것일까

 

이제, 놀랍도록 꽃들이 피고

세상 쓸쓸함은 사라지겠지만

휘적휘적, 청승맞게

오늘은 마실이나 갈거나

 

 

*함박꽃

 

춘우春雨

 

 

아픔이 저리도 아름답구나

쓰려다 쓰려다 남겨 논

마지막 연서(戀書), 얼룩진 여백으로

조개골 산목련이 진다

 

누군들 강이 되고 싶지 않으리

머무는 듯 흘러

먼 바다 가 닿고 싶지 않으리

 

여울목 미어짐도 그 무엇도

이제는 꼭꼭 품고 갈

속 깊은 강물일 사람아

 

다리쉼하는 나루 날은 저물어

꽃 진 자리 쓰리고 쓰린

내게는 아직도 아픔이기에

 

산목련 지는 날은 겨울보다 더 춥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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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목련 : 함박꽃.

 

 

*노루귀


 

봄비

 

 

정 많아 쉬 흔하시던 눈물

 

총총 거두어 밤길 잡아 가신 그곳에

칭얼대는 쉰둥이

홀앗이로 넘던 보릿고개

차마 있으라구요

꽃샘 잎샘 차마 있을라구요

 

쉰이 다 되어 풀석이는

내 영혼의 회갈색 메마른 산비알

촉촉히 적시는 저 영롱한

()의 방울 같은 봄비가

당신 먼 나라에서 보내오신,

꽃다운 젊은 날의 그 흔하시던 눈물

정녕 아닐 테지요

 

번지는 연두빛 어룽어룽

산이 어린애마냥 조잘댑니다

 

 

*참꽃마리


 

먼동

 

 

바람이 어둠을 흔들어 깨우면

돌아 서서 흐느끼는 신갈 숲

 

절름발이 피투성이 서러운 반쪽의 봄

아서라 그 아픔 누가 모르랴

그저 모든 것을 위해

안으로 안으로 삭혀야 할 뿐

 

먼동이 트고

무제치기 무지개가 걸리면

온 산 흐드러질 진달래 울음

 

 

       * 권경업 시집 자작 숲 움틀 무렵-지리산 치밭목(명상, 1999)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