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럼비 해안에서
이제는 벨과 자리*
오월에도 뵈지 않는다
만선을 꿈꾸던 배는 어디론가 다 떠나고
파도는 테트라포드에
발이 묶여 잠들었다
썰물이 질 때마다
환상통을 앓는 바다
별빛 달빛 쫓아버린 탐조등 불빛 앞에
난만히 노을에 취한
갈매기도 날지 않고
아직껏 떠나지 못한
어리보기 범섬 향해
너럭바위 추념하듯 띄우는 테우 한 척
강정천 굽은 어깨가
레이더에 잡혀 떤다
---
*멸치와 자리돔
♧ 목시물굴*의 별
아버지는 집에 남은 돼지만 생각하셨다
삼촌들은 캐지 못한 고구마가 걱정이었다
동네가 다 모였다며 하르방은 웃으셨다
거적을 깐 바닥에선 겨울이 스멀거렸다
서로 맞댄 등마루가 온돌처럼 따스했다
어둠 속 초롱한 눈빛, 별을 닮아 있었다
굴 어귀 옻 잎에도 선홍빛 해가 비쳤다
혼이 빠진 총소리가 생솔 타는 소릴 냈다
후드득 별이 떨어진 참 맑은 아침이었다
---
* 1948년 11월 25일, 토벌대에 의해 약 40여 명의 희생자를 낸 조천읍 선흘리 소재 4․3유적지.
♧ 보호수만 사는 마을
-무등이왓 팽나무*
자동차 불빛에도 소스라쳐 잠을 깬다
마른번개 번쩍이던 삼밭 구석 우영밭이
대지른 군홧발 아래 묵밭이 된 그날부터
곡조차 할 수 없는 무등이왓 이웃들이
큰넓궤와 도엣궤로 밤도와 떠날 적에
먼발치 도너리오름도 몸을 잔뜩 웅크렸다
외줄기 섬광처럼 어둠을 찢던 비명
개 짖는 소리마저 불타버린 마을에는
칡넝쿨 환삼덩굴이 옛 자취를 지우고
꽃샘 잎샘 지난 봄날 잎 다시 푸르러도
다시는 볼 수 없는 그늘에서 쉬던 이들
무너진 돌담 너머로 까치놀만 우련하다
---
*제주 4․3 당시 중산간마을 소개작전으로 파괴된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의 자연마을인 무등이왓 터에 홀로 서 있는 수령 약 500년 된 팽나무.
*임채성 시조집 『메께라』 (고요아침, 2024)에서
'아름다운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월간 '우리詩' 5월호의 시(4) (0) | 2024.05.25 |
---|---|
김순선 시집 '어느 토요일 오후'의 시(7) (1) | 2024.05.24 |
월간 '우리詩' 5월호의 시(3) (0) | 2024.05.22 |
계간 '제주작가' 봄호의 시조(1) (0) | 2024.05.21 |
월간 '우리詩' 5월호의 시(2) (0) | 2024.05.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