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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임채성 시조집 '메께라'의 시조(9)

by 김창집1 2024. 5. 23.

 

 

구럼비 해안에서

 

 

이제는 벨과 자리*

오월에도 뵈지 않는다

만선을 꿈꾸던 배는 어디론가 다 떠나고

파도는 테트라포드에

발이 묶여 잠들었다

 

썰물이 질 때마다

환상통을 앓는 바다

별빛 달빛 쫓아버린 탐조등 불빛 앞에

난만히 노을에 취한

갈매기도 날지 않고

 

아직껏 떠나지 못한

어리보기 범섬 향해

너럭바위 추념하듯 띄우는 테우 한 척

강정천 굽은 어깨가

레이더에 잡혀 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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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치와 자리돔

 

 


 

목시물굴*의 별

 

 

아버지는 집에 남은 돼지만 생각하셨다

 

삼촌들은 캐지 못한 고구마가 걱정이었다

 

동네가 다 모였다며 하르방은 웃으셨다

 

거적을 깐 바닥에선 겨울이 스멀거렸다

 

서로 맞댄 등마루가 온돌처럼 따스했다

 

어둠 속 초롱한 눈빛, 별을 닮아 있었다

 

굴 어귀 옻 잎에도 선홍빛 해가 비쳤다

 

혼이 빠진 총소리가 생솔 타는 소릴 냈다

 

후드득 별이 떨어진 참 맑은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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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81125, 토벌대에 의해 약 40여 명의 희생자를 낸 조천읍 선흘리 소재 43유적지.

 

 


 

보호수만 사는 마을

   -무등이왓 팽나무*

 

 

자동차 불빛에도 소스라쳐 잠을 깬다

마른번개 번쩍이던 삼밭 구석 우영밭이

대지른 군홧발 아래 묵밭이 된 그날부터

 

곡조차 할 수 없는 무등이왓 이웃들이

큰넓궤와 도엣궤로 밤도와 떠날 적에

먼발치 도너리오름도 몸을 잔뜩 웅크렸다

 

외줄기 섬광처럼 어둠을 찢던 비명

개 짖는 소리마저 불타버린 마을에는

칡넝쿨 환삼덩굴이 옛 자취를 지우고

 

꽃샘 잎샘 지난 봄날 잎 다시 푸르러도

다시는 볼 수 없는 그늘에서 쉬던 이들

무너진 돌담 너머로 까치놀만 우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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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당시 중산간마을 소개작전으로 파괴된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의 자연마을인 무등이왓 터에 홀로 서 있는 수령 약 500년 된 팽나무.

 

 

                     *임채성 시조집 메께라(고요아침, 2024)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