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작노트 5
자주 생각하는 방향으로
내 마음을 살짝 기울인 대상을 닮아가는 모습으로
그렇게 삶은 물들게 마련이다
어느새 내게 스며든 시가 있다
내가 그 ‘다른 시’를 보았을 때
시가 물컹 좋아졌다
♧ 삘기꽃
꽃인 줄 알았는데 먹고 싶은 껌이었다
껌인 줄 알았는데 나풀나풀 꽃이었다
입안에
질겅거리며
달콤함 느껴지는
삘기는 내게 있어 아카시아 껌이었다
오월에 어김없이 뾰족뾰족 올라와
배고픈
아이의 배를
채워주던 밥이었다
때로는 껌이 되고 때로는 밥이 되다
삥이치기 놀이로 해지는 줄 모르다가
향기만
남겨 놓은 채
홀연 꽃이 돼버리는
♧ 다른 시를 보네
한 분은 시 잘 써서 이름이 나
나서서 이 상 저 상 챙기기 연연하고
저 혼자 잘난 갑질에 꺾여버린 시심들
한 분은 사람 좋아 이름이 나 있었네
밥 한끼 사주면서 살뜰히 생겨주고
안부를 주고받는 사이, 시심을 살려쥤데
사람도 솎아내야 그 자리 새살 돋듯
비워 문 그 자리에 시들이 살아났네
이제야 사람 냄새 나는 시, 문득문득 보이네
♧ 보그락이*
아무리
생각해도
내게는 올 수 없다
새삼스레 꺼내들고
지켜야 할 약속도 없다
그래도
을씨년스런 방
보그락이 널 당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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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그락이 : ‘보송보송하거나 폭신폭신한 꼴’의 제주어.
♧ 말산디 보말산디*
의사 수 증원되면 의료가 붕괴된다며
전공의 집단 사직에 의료대란 일어나
응급실 입구와 출구, 발걸음만 분주하다
불통인지 불편인지 제 입장만 내는 사이
근무하다 뇌출혈로 쓰러진 간호사는
수술을 제때 못 받아 꽃다운 생 끝냈네
천지가 한 방향인 걸 바보도 먼저 안다
말산디 보말산디 못 배우고 못 가진 자
목숨도 저들의 손에 쥐락펴락 당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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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산디 보말산디 : ‘말 같지 않은 말을 하거나 들었을 때, 핀잔이나 반박하면서
하는 말’의 뜻을 지닌 제주어.
*김신자 시조집 『봄비에 썼던 문장은 돌아오지 않는다』 (동학시인선 122, 2024)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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