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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월간 '우리詩' 8월호의 시(4)

by 김창집1 2024. 8. 21.

 

 

장날 - 조병기

 

 

달걀 서너 줄 들고

졸졸 어머니 따라 장터로 간다

탱자나무꽃 핀 과수원길 지나

쥐똥나무 꽃향기 나는 마을 골목길

장터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어물전, 포목점, 대장간

길가에 앉아 잔치국수 한 사발

어머니는 생명태 한 꾸러미

나는 고무신 한 켤레

세상은 온통 내 것이라

 

 


 

덩굴장미의 꿈 - 강우현

 

 

꿈꾸던 겨울이 기대어 섰던 메쉬펜스에

덕담 같은 봄을 입고 아침을 여는 덩굴장미가 있습니다

 

꽃잎이 하나씩 떨어지는 바닥에

민달팽이 걸음으로

자리 거두는 그늘이 있습니다

 

무기계약직이 첫 출근하던 날

부끄러움을 모르는 꽃이 품고 있던 벌 한 마리

꽃을 바꿔 가며 파고들던 더듬이가 볼 일을

제대로 봤다는 생각이 듭니다

 

비대칭인 얼굴에 웃음을 그리고 싶은 날이 가고

살쪘던 꿈이 헐렁해진 채로 가을 역에 도착했습니다

나를 데려오느라 지친 바람도 주머니가 있어

아직 따뜻한 꿈 하나 만져진다면

노을빛이 묻어날 것입니다

 

꽃송이들이 솔방울을 다는 소나무처럼

바람의 노래를 따라

쇄 버린 목청으로 향기를 날립니다

덩굴의 무성했던 그늘이 사라지기 전 자리를 내주어야 합니다

 

 


 

두루마리 휴지 - 김미외

 

 

 끊어질 듯 점선으로 직한 단절들, 엎질러진 커피와 닦아야 할 오염을 바라보고 있을 때

 전화가 왔고,

 손끝으로 전해지는 떨림을 놓치고

 뚝뚝 울음 두드리는 그 순간

 

 뒹굴던 눈물이 떨어져 파문을 만들 때

 욕조의 마개를 막고 뜨거운 물을 들어 채우고 있었다 피어오르는 열기로 뿌옇게 흐려지는 거울을 닦기 위해 손에 든 휴지

 

 둥근 심을 숨긴 몸체를 욕조에 빠뜨린다

 

 더 멀리 있는 나를 빨아들이는 고요의 시간

 더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슬픔을 삼키는 상처의 시간

 

 서서히

 

 몸에 찍힌 장미꽃을 옥죄며 줄어들던

 한 덩어리 욕망이

 너덜너덜 풀어지며 떠다닌다

 

 버려지기 전에 사라지고 싶다

 

 


 

꿈 없는 잠 여연

 

 

강아지가 자면서 잠꼬대한다

봄밤에 벚꽃 달리듯 몹시 바쁘게

네 발을 꼼지락거리며 허둥대고

눈과 입과 코를 움찔거리며 낑낑거린다

너조차도 꿈을 좇느라 고단하구나

바들바들 떨면서 마냥 달리는구나

 

나는 꿈을 꾸는가

나는 꿈꿔 본 지가 언제였던가

꿈꾸느라고 숙면하지 못했던 수많은 밤

꿈 좇느라고 앞에 있는 소중한 것들은

무한히 스쳐 보내지 않았던가

꿈꾸느라고 모래 폭풍처럼 부산했던 젊음이여

 

그러나 꿈 없는 잠은 얼마나 삭막한가

꿈 없는 잠은 밤의 사막, 황량한 죽음이다

꿈을 양산하던 요람은 절멸하고

수의를 걸친 밤이 꿈을 삼켜 버려

자정을 떠난 새벽이 아슬하다

 

 

                                *월간 우리8월호(통권434)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