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날 - 조병기
달걀 서너 줄 들고
졸졸 어머니 따라 장터로 간다
탱자나무꽃 핀 과수원길 지나
쥐똥나무 꽃향기 나는 마을 골목길
장터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어물전, 포목점, 대장간…
길가에 앉아 잔치국수 한 사발
어머니는 생명태 한 꾸러미
나는 고무신 한 켤레
세상은 온통 내 것이라
♧ 덩굴장미의 꿈 - 강우현
꿈꾸던 겨울이 기대어 섰던 메쉬펜스에
덕담 같은 봄을 입고 아침을 여는 덩굴장미가 있습니다
꽃잎이 하나씩 떨어지는 바닥에
민달팽이 걸음으로
자리 거두는 그늘이 있습니다
무기계약직이 첫 출근하던 날
부끄러움을 모르는 꽃이 품고 있던 벌 한 마리
꽃을 바꿔 가며 파고들던 더듬이가 볼 일을
제대로 봤다는 생각이 듭니다
비대칭인 얼굴에 웃음을 그리고 싶은 날이 가고
살쪘던 꿈이 헐렁해진 채로 가을 역에 도착했습니다
나를 데려오느라 지친 바람도 주머니가 있어
아직 따뜻한 꿈 하나 만져진다면
노을빛이 묻어날 것입니다
꽃송이들이 솔방울을 다는 소나무처럼
바람의 노래를 따라
쇄 버린 목청으로 향기를 날립니다
덩굴의 무성했던 그늘이 사라지기 전 자리를 내주어야 합니다
♧ 두루마리 휴지 - 김미외
끊어질 듯 점선으로 직한 단절들, 엎질러진 커피와 닦아야 할 오염을 바라보고 있을 때
전화가 왔고,
손끝으로 전해지는 떨림을 놓치고
뚝뚝 울음 두드리는 그 순간
뒹굴던 눈물이 떨어져 파문을 만들 때
욕조의 마개를 막고 뜨거운 물을 들어 채우고 있었다 피어오르는 열기로 뿌옇게 흐려지는 거울을 닦기 위해 손에 든 휴지
둥근 심을 숨긴 몸체를 욕조에 빠뜨린다
더 멀리 있는 나를 빨아들이는 고요의 시간
더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슬픔을 삼키는 상처의 시간
서서히
몸에 찍힌 장미꽃을 옥죄며 줄어들던
한 덩어리 욕망이
너덜너덜 풀어지며 떠다닌다
버려지기 전에 사라지고 싶다
♧ 꿈 없는 잠 – 여연
강아지가 자면서 잠꼬대한다
봄밤에 벚꽃 달리듯 몹시 바쁘게
네 발을 꼼지락거리며 허둥대고
눈과 입과 코를 움찔거리며 낑낑거린다
너조차도 꿈을 좇느라 고단하구나
바들바들 떨면서 마냥 달리는구나
나는 꿈을 꾸는가
나는 꿈꿔 본 지가 언제였던가
꿈꾸느라고 숙면하지 못했던 수많은 밤
꿈 좇느라고 앞에 있는 소중한 것들은
무한히 스쳐 보내지 않았던가
꿈꾸느라고 모래 폭풍처럼 부산했던 젊음이여
그러나 꿈 없는 잠은 얼마나 삭막한가
꿈 없는 잠은 밤의 사막, 황량한 죽음이다
꿈을 양산하던 요람은 절멸하고
수의를 걸친 밤이 꿈을 삼켜 버려
자정을 떠난 새벽이 아슬하다
*월간 『우리詩』 8월호(통권434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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