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배진성 시집 '이어도 공화국⑤ 우리들의 고향'의 시(3)

by 김창집1 2023. 10. 29.

 

 

가을바람은 자꾸 날더러

 

 

가을바람은 자꾸 날더러 바람이 돼라 하네

가을바람은 자꾸 날더러 가을이 돼라 하네

가을바람은 자꾸 날더러 단풍이 돼라 하네

마지막 남은 목숨 사랑만 하라 하네

오직 사랑으로만 타오르는 꽃이 돼라 하네

가을바람은 자꾸만 날더러 바람이 돼라 하네

가을바람은 자꾸만 날더러 단풍이 돼라 하네

가을바람은 자꾸만 날더러 가을이 돼라 하네

겨울이 오기 전에 가을이 돼라 하네

봄으로 다시 꽃 피는 가을이 돼라 하네

가을바람은 자꾸만 나더러

떠나는 바람이 아니라 만나는 바람이 돼라 하네

 

 

 

 

가시나무새와 누란의 양파꽃

 

 

당신과는 발가락도 닮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

고백하면서 해는 서산마루를

붉게 걸어가고 나는 잠을 깬다

 

밤에만 피는 꽃잎 속에서 나는

살아있다 어둠은 나의 집이다

그 집에는 천년을 열어도 다

열지 못할 많은 문이 있다

천년에 딱 한 번 한꺼번에

잠깐 어둡게 열렸다가 스스로 잠긴다

 

그 속에는 발가락도 닮지 않은

사랑하는 당신이 있다

고백한다 그리하여 나는 살아있다

살아있다 그리하여 나는 사랑한다

사랑한다 그리하여 나는 고민한다

고민한다 그리하여 나는 불러본다

불러본다 그리하여 나는 울어본다

울어본다 그리하여 나는 웃어본다

웃어본다 그리하여 나는 도망친다

도망친다 그리하여 나는 쓰러진다

쓰러진다 그리하여 나는 돌아본다

돌아본다 그리하여 나는 다시 살아난다

 

사랑하기 위하여 저만치

저만치 피어있는 꽃 한 송이

 

 

 

 

가난과 자유

 

 

난장에 내던져진 삶 속에서도

들풀들은 사랑을 소중히

간직할 줄 압니다

사랑은 사람을 사소하게 만들고

사람을 섬세하게 만들어

기릅니다

가난한 들판에 피어난

제비꽃 가슴의 자유를 보며

삶터와 장터 사이에서

나는 오늘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과꽃망울

 

 

득음을 위한 독공이 한창이다

 

사과나무 속에서

고려청자 굽는 소리 들린다

조선백자 깨뜨리는 소리 들린다

수없이 많은 사금파리들이 쌓인다

 

사과나무 속에서

사과를 미리 빚어보고 구워보고 깎아본다

 

산수유, 개나리, 진달래, 벚꽃

성질 급한 봄꽃들이 속옷 바람으로 뛰쳐나와도

사과나무는

진득하니 사과나무 속에서 사과만을 만들고 있다

 

울컥, 울혈을 토해내고 있다

 

 

 

 

이어주는 섬

 

 

섬들이 징검다리처럼 있다

섬들이 징검다리처럼 물속에 발을 담그고 있다

섬들이 징검다리가 되어 나를 밟고 지나간다

 

내 안에 섬들의 발이 있다

내 가슴 속에 섬들의 발자국이 있다

 

내 가슴 속에 이어도가 있다

내 가슴 속에 이어주는 섬이 있다

나는 징검다리 같은 이어도가 된다

 

 

    * 배진성 시집 이어도 공화국우리들의 고향(시산맥, 2023)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