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의 말
허술한 바람의 문장이 여기까지, 날 데려왔다.
앞으로 나는
지금보다 더 허술해질 것 같다.
2023년 9월
김영순
♧ 포옹
말은 제가 지나온 길을 돌아보지 않는다
세렝게티 초원에서나 한라산 기슭에서나
서로의 뒤를 봐주느라 그 일생이 다 간다
♧ 싸락눈만 싸락싸락
크리스마스 전날 밤
군밤장수 써 붙인 글
‘고요한 밤 3000원’
‘거룩한 밤 5000원’
온다는 그대는 안 오고
싸락눈만 싸락싸락
♧ 한통속
어머니 아버지가 있어야 친정이지
모처럼 추석이라 산소에 들렀다가
하늘이 흘린 젯밥 같은
도토리만 주워왔네
동글동글 한 바가지
씻고 말려 두 바가지
상수리 갈참 굴참 졸참 떡갈 신갈나무…
한통속 불러들이고
묵사발이나 만들까
며칠을 그냥 두니 고물고물 고것들
서로에게 밥이 되어주고 있었나 봐
세상에 기대어 사는
그런 나도 한통속
♧ 달과 고래
일부러 그대 안에 한 며칠 갇히고 싶다
행원리 어등포구 일곱물이나 여덟물쯤
기어코 월담을 하듯 원담에 든 남방큰돌고래
섬 뱅뱅 돌다 보면 거기가 거기인데
사람들이 내쫓아도 자꾸만 들어온다
네게도 피치 못할 일, 있기는 있나보다
먼 데 있는 저 달은 들물날물 엮어내며
하늘에서 뭇 생명을 조물조물 거느린다
한동안 참았던 그 말
물숨이듯 내뿜고 싶다
*김영순 시집 『밥 먹고 더 울기로 했다』 (시인동네 시인선 215, 2023)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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