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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김영순 시집 '밥 먹고 더 울기로 했다'의 시(1)

by 김창집1 2023. 11. 1.

 

 

시인의 말

 

 

허술한 바람의 문장이 여기까지, 날 데려왔다.

 

앞으로 나는

지금보다 더 허술해질 것 같다.

 

               20239

                       김영순

 

 

 

포옹

 

 

말은 제가 지나온 길을 돌아보지 않는다

 

세렝게티 초원에서나 한라산 기슭에서나

 

서로의 뒤를 봐주느라 그 일생이 다 간다

 

 

 

 

싸락눈만 싸락싸락

 

 

크리스마스 전날 밤

군밤장수 써 붙인 글

 

고요한 밤 3000

거룩한 밤 5000

 

온다는 그대는 안 오고

싸락눈만 싸락싸락

 

 

 

 

한통속

 

 

어머니 아버지가 있어야 친정이지

모처럼 추석이라 산소에 들렀다가

하늘이 흘린 젯밥 같은

도토리만 주워왔네

 

동글동글 한 바가지

씻고 말려 두 바가지

상수리 갈참 굴참 졸참 떡갈 신갈나무

한통속 불러들이고

묵사발이나 만들까

 

며칠을 그냥 두니 고물고물 고것들

서로에게 밥이 되어주고 있었나 봐

세상에 기대어 사는

그런 나도 한통속

 

 

 

 

달과 고래

 

 

일부러 그대 안에 한 며칠 갇히고 싶다

행원리 어등포구 일곱물이나 여덟물쯤

기어코 월담을 하듯 원담에 든 남방큰돌고래

 

섬 뱅뱅 돌다 보면 거기가 거기인데

사람들이 내쫓아도 자꾸만 들어온다

네게도 피치 못할 일, 있기는 있나보다

 

먼 데 있는 저 달은 들물날물 엮어내며

하늘에서 뭇 생명을 조물조물 거느린다

 

한동안 참았던 그 말

물숨이듯 내뿜고 싶다

 

 

         *김영순 시집 밥 먹고 더 울기로 했다(시인동네 시인선 215, 2023)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