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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김영순 시집 '밥 먹고 더 울기로 했다'의 시(4)

by 김창집1 2023. 11. 22.

 

 

 

작약꽃 안부

 

 

비행기 배꼽자리 작약을 심어놓고

꽃을 따야 한다면서 끝내 따지는 않고

잔칫상 차려놓은 듯 사월마당이 북적였다

 

언제든 보낼 거라 짐작이야 했지만

어머니 아버지 제사는 이제 안 지낼 거다

단번에 확, 피어버린 문장

감당할 수 없었다

 

그 문장 빠져나오다 마주친 뻐꾸기 울음

한가득 그러안고 산소 곁을 서성인다

봄밤은 어디로 가나

갈 데 없는 나를 두고

 

 

 

 

소리를 보다

 

 

수업 중에 자꾸만 걸려오는 어머니 전화

몇 번이나 대답해도 귀가 먹어 막막하고

목소리 크게 내지 못해 나는 또 먹먹하고

 

보청기 주파수는 어디로 향한 걸까

부재중 문자를 따라 한달음 달려가면

일 없다, 밥이나 먹자

이 말 저 말 궁굴리는데

 

안 들린다면서요?”

지금은 들려요?”

저녁밥 먹다 말고 얼굴만 빤히 보다가

순순히 고백하신다

입 모양으로 다 알주

 

 

 

 

유품보고서

 

 

한낱 유품이란 매미 허물 같은 걸까

껍질만 벗어놓고 황급히 뜨신 그 길

어머니 놓친 올레길

복작복작 첫 제삿날

 

어쩌라고 씨고구마 장롱 속에 남겼을까

어머니를 모시듯 내 집으로 들고 와

수반에 물 한 사발도

같이 올려놓는다

 

썩으면 썩는 대로 내다 버릴 참이었는데

잔소리 삐죽삐죽 잔소름 돋는 새순

제상에 무릎 끓은 나도

어쩌면 외로운 유품

 

 

 

 

달빛 봉봉

 

 

고등어는 고등어자리돔은 그냥 자리

하고 많은 생선 중에 옥돔만 생선이랬지

먼 바다 푸들거리던 당일바리 옥돔

 

육지에선 명절 때 조기도 쓴다지만

나 죽으면 제상에 생선은 올려도라

부탁도 빈말하듯이 바람결에 흘리셨지

 

이제는 제사 명절 한 번에 치르자는데

어머닌 따로 안 차려 섭섭하다 하실 건가

생선이 마르던 옥상엔

꾸들꾸들 달빛 봉봉*

 

---

* ‘가득하다의 제주어.

 

 

 

 

편백나무에 대한 예의

 

 

이월에 눈 내린다

편백나무에 함박함박

 

! 가지 부러지는 소리 이따금 들려오면

아버지 마른기침이 울타리 돌아 나오고

 

남원과 조천 사이 길이 새로 나면서

옛집이 헐리고 나무들 잘려나가고

그 많던 편백나무는 궤짝 하나로 내게 왔다

 

유산에 대한 예의는 그 안쪽을 살피는 일

물걸레질 한번에도 아버지 냄새 흘러넘쳐

그 안에 영농일기장

내 습작노트를 넣어둔다

 

 

         * 김영순 시집 밥 먹고 더 울기로 했다(시인동네 시인선 215, 2023)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