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월간 '우리詩' 11월호의 시(3)

by 김창집1 2023. 11. 19.

 

 

세한도 - 송수권

 

 

먹붓을 들어 빈 공간에 선을 낸다

가지 끝 위로 치솟으며 몸놀림하는 까치 한 쌍

이 여백에서 폭발하는 울음……

 

먹붓을 들어 빈 공간에 선을 낸다

고목나무 가지 끝 위에 까치집 하나

더 먼 저승의 하늘에서 폭발하는 울음……

 

한 폭의 그림이

질화로같이 따습다.

 

 

 

 

이중섭의 소 - 이대흠

 

 

자신의 뿔로 들어가기 위해 소는

뒷다리를 뻗는다 서귀포에서 부산에서

뿔로 들어가 단단한 힘이 되어

세상의 고름을 터뜨리리. 소는 온몸을

뿔 쪽으로 민다 소의 근육을 따라 툭툭

햇살은 튕긴다 앞다리 들어 펄쩍

들어가고 싶다 소가 뛰면

뿔도 뛴다 젠장 명동에서 종로에서

뿔로 들어가고 싶은데 뿔은 또

저만치 앞서 있다 참을 수 없어 소는

속력을 낸다 뿔은 또

멀리 달아나고 뿔로 들어가고 싶어

소는, 나는

일생을

 

 

 

 

- 신경림

 

 

사나운 뿔을 갖고도 한 번도 쓴 일이 없다

외양간에서 논밭까지 고삐에 매여서 그는

뚜벅뚜벅 평생을 그곳만을 오고 간다

때로 고개를 들어 먼 하늘을 보면서도

저쪽에 딴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는 스스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

쟁기를 끌면서도 주인이 명령하는 대로

이려 하면 가고 워워 하면 서면 된다

콩깍지 여물에 배가 부르면

큰 눈을 꿈벅이며 식식 새김질을 할 뿐이다

 

도살장 앞에서 죽음을 예감하고

두어 방울 눈물을 떨구기도 하지만 이내

살과 가죽이 분리되어 한쪽은 식탁에 오르고

다른 쪽은 구두가 될 것을 그는 모른다

사나운 뿔은 아무렇게나 쓰레기통에 버려질 것이다

 

 

 

 

궁금한 일 - 장석남

    -박수근의 그림에서

 

 

  인쇄한 박수근 화백 그림을 하나 사다가 걸어놓고는 물끄러미 그걸 치어다보면서 나는 그 그림의 제목을 여러 가지로 바꾸어보곤 하는데 원래 제목인 강변도 좋지마는 할머니라든가 손주라는 제목을 붙여보아도 가슴이 알알한 것이 여간 좋은 게 아닙니다. 그러다가는 나도 모르게 한 가지 장면이 떠오릅니다. 그가 술을 드시러 저녁 무렵 외출할 때에는 마당에 널린 빨래를 걷어다 개어놓곤 했다는 것입니다. 그 빨래를 개는 손이 참 커다랬다는 이야기는 참으로 장엄하기까지 한 것이어서 성자의 그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는 멋쟁이이긴 멋쟁이였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또한 참으로 궁금한 것은 그 커다란 손등 위에서 같이 꼼지락거렸을 햇빛들이며는 그가 죽은 후에 그를 쫓아갔는가 아니면 이승에 아직 남아서 어느 그러한, 장엄한 손길 위에 다시 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가 마른 빨래를 개며 들었을지 모르는 뻐꾹새 소리 같은 것들은 다 어떻게 되었을까. 내가 궁금한 일들은 그러한 궁금한 일들입니다. 그가 가지고 갔을 가난이며 그리움 같은 것은 다 무엇이 되어 오는지…… 저녁이 되어 오는지…… 가을이 되어 오는지…… 궁금한 일들은 다 슬픈 일들입니다.

 

 

 

 

새들의 저울 - 김명숙

 

 

새들에겐 저울이 있다

나뭇가지에 내려앉는 새들은

발바닥 저울을 믿는다

 

무게를 재지 않아도

중심을 잡고

사뿐히 내려앉는 저 믿음

 

한 치의 오차라도 생기면

날개가 추락한다는 걸 알기에

그들의 믿음엔 흔들림이 없다

 

세상의 부모는

사랑을 무게로 재지 않는다

 

자식의 일 앞에서는

윤리나 도덕이나

이해관계를 따지지 않는다

 

잠시 잠깐 휘청대다가

이내 중심을 잡고

나뭇가지에 내려앉는 새들처럼

헌신의 수레바퀴를 돌린다

 

 

                      * 월간 우리11월호(통권425)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