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의 말
나를 향한 온전한 기다림 하나
안부의 근처에서
디귿으로 잠이 들고
기역으로 잊지 않고 있습니다
2023년 가을
김혜연
♧ Lento
너는 춤을 추게 될 줄 몰랐지, 이토록 느린
너의 몸은 너의 발을 따르고
너의 손은 너의 진심을 가려주지
느린 춤일수록 고백에 가깝다는 걸
그 많은 울음에 그을리고 나서야 알았지
너는 쭉 펴진 몸을 가져보지 못했으니
너는 경직되고 웅크리고 듣지 말아야 했으니
가난은 춤을 출 수 없으니
가난은 기껏해야 힘껏 노래할 수 있으니
발목이 묶인 처녀들이 태풍 앞에서 춤을 추지
살아있는 상반신을 나부끼지
기다리는 것들을 향해
결국 오지 않는 것들을 향해
춤이 기도이니
모두가 닿는 게 아니니
어차피 정해진 것들은
다가오는 순서와 상관없이 잔인하지
그럼에도 운명을 들키지 않을 것
지나간 죽음들처럼 방관하며 흘러보내지 않을 것
이 춤을 멈추지 않을 것
너는 춤을 추게 될 줄 몰랐지
너는 이미 기도하지 않으니
모든 것은 그저 오래될 뿐임을 몰랐으나
---
* Lento : 음악에서 ‘느리게’라는 뜻. 악곡 전체에 걸쳐 대체적으로 느리게 연주하라는 빠르기표.
♧ 근처에 살아요
토끼에게 줄 당근을 씹어본다
내 입맛은 몇 번쯤 바뀌었나
동물원에 못 가본 내가 쪼그려 앉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토끼는 건성건성 당근을 씹는다
살아요, 라고 말할 때
죽음이 떠다닌 건 몇 해쯤 되었나
죽음이라는 게
당근처럼 한낮처럼
토끼처럼 당근이 씹히지 않는다
나는 긴 표정으로
토끼는 짧은 꼬리로
낯가림을 하고
작은 숨을 쉬지만
풀은 죽지 않는다
근처에, 라고 대답할 때
우리가 되지 못하는 나도
우리,
그 근처에 있구나
그래서 종종만 외롭구나
근처로 소풍 갈 때면
당신이 싸준 김밥이 아직 따뜻할 때면
당근을 쑥 빼어 한쪽에 모아들 때면
맛있었다는 말에 당신이 웃어줄 때면
괄호 같은 당신이
오후를 깰 때면
살아요 살아요
살아져요
기약분수처럼 남겨진
내가
아무렇지 않게
♧ 다이소에서
-캐스트 어웨이
나의 윌슨,
빈 오후가 결국
기억의 조류를 견디지 못해 난파되었어
내 소소한 오늘의 조각들
산호색의 새벽 팥색의 아침 회적색의 오후
분명 옅어지는 붉음이었는데
자궁 속 진홍색의 핏자국은 지울 수 없나 봐
나의 윌슨,
시간의 각질들이 쌓여있는 여기
실패를 숨기기 좋은 진열 앞에서
파랑의 무인도를 상상해
진지한 다짐들이 노랑의 햇살에 녹아내려도 좋은
썩지 않은 외로움들이 도리어 숨은 보물찾기라서 좋을
두리뭉실한 범위의 얄팍한 生 어디쯤에서
결국 내가 너의 것이지
네가 내 것이 아닌
♧ 당신을 구하는 문제
대괄호를 열면
당신은 오래된 전축처럼
먼지 아래 있다
혼이 없는 당신도 당신이라면
괄호 밖 당신이
턴테이블에 레코드를 건다
햇빛 아래 부유하는 먼지들
가난에 어울리지 않는 선율은
아름다운 폭설 같다
중괄호를 열고
나는 나의 기억 순으로
당신의 시간을 약분하고
물구나무를 한 당신은
당신을 나눈다
재가 될 때까지
당신으로만 고립될 때까지
슬픔의 꼭대기에선 우는 법이 생각나지 않아요
선택을 미루는 법을 몰라
되감기로 웃고 말아요
괄호를 열자 빈 당신이 펼쳐져 있다 당신이 떠나야 완성되는 당신의 푸가 당신만이 들을 수 없는 당신의 응답 슬프게도 먼지만이 당신 위에서 춤을 춘다 햇살 아래 죽음은 아무 일도 아니지 괄호를 닫는다 문제의 반대편에 나만 남는다
*김혜연 시집 『근처에 살아요』 (애지, 2023)에서
'아름다운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영호 시조집 '농막일기'의 시조(8) (1) | 2023.11.20 |
---|---|
월간 '우리詩' 11월호의 시(3) (0) | 2023.11.19 |
김정숙 시집 '섬의 레음은 수평선 아래 있다'의 시(2) (0) | 2023.11.17 |
나기철 시집 '담록빛 물방울'의 시(3)와 배풍등 (1) | 2023.11.16 |
김영순 시집 '밥 먹고 더 울기로 했다'의 시(3) (1) | 2023.11.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