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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김혜연 시집 '근처에 살아요' 발간(1)

by 김창집1 2023. 11. 18.

 

 

시인의 말

 

 

나를 향한 온전한 기다림 하나

 

안부의 근처에서

디귿으로 잠이 들고

기역으로 잊지 않고 있습니다

 

 

2023년 가을

김혜연

 

 

 

 

Lento

 

 

너는 춤을 추게 될 줄 몰랐지, 이토록 느린

너의 몸은 너의 발을 따르고

너의 손은 너의 진심을 가려주지

느린 춤일수록 고백에 가깝다는 걸

그 많은 울음에 그을리고 나서야 알았지

너는 쭉 펴진 몸을 가져보지 못했으니

너는 경직되고 웅크리고 듣지 말아야 했으니

가난은 춤을 출 수 없으니

가난은 기껏해야 힘껏 노래할 수 있으니

발목이 묶인 처녀들이 태풍 앞에서 춤을 추지

살아있는 상반신을 나부끼지

기다리는 것들을 향해

결국 오지 않는 것들을 향해

춤이 기도이니

모두가 닿는 게 아니니

어차피 정해진 것들은

다가오는 순서와 상관없이 잔인하지

그럼에도 운명을 들키지 않을 것

지나간 죽음들처럼 방관하며 흘러보내지 않을 것

이 춤을 멈추지 않을 것

너는 춤을 추게 될 줄 몰랐지

너는 이미 기도하지 않으니

모든 것은 그저 오래될 뿐임을 몰랐으나

 

---

* Lento : 음악에서 느리게라는 뜻. 악곡 전체에 걸쳐 대체적으로 느리게 연주하라는 빠르기표.

 

 

 

 

근처에 살아요

 

 

토끼에게 줄 당근을 씹어본다

내 입맛은 몇 번쯤 바뀌었나

동물원에 못 가본 내가 쪼그려 앉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토끼는 건성건성 당근을 씹는다

 

살아요, 라고 말할 때

죽음이 떠다닌 건 몇 해쯤 되었나

죽음이라는 게

당근처럼 한낮처럼

토끼처럼 당근이 씹히지 않는다

 

나는 긴 표정으로

토끼는 짧은 꼬리로

낯가림을 하고

작은 숨을 쉬지만

풀은 죽지 않는다

 

근처에, 라고 대답할 때

우리가 되지 못하는 나도

우리,

그 근처에 있구나

그래서 종종만 외롭구나

 

근처로 소풍 갈 때면

당신이 싸준 김밥이 아직 따뜻할 때면

당근을 쑥 빼어 한쪽에 모아들 때면

맛있었다는 말에 당신이 웃어줄 때면

 

괄호 같은 당신이

오후를 깰 때면

살아요 살아요

살아져요

기약분수처럼 남겨진

내가

아무렇지 않게

 

 

 

 

다이소에서

     -캐스트 어웨이

 

 

나의 윌슨,

빈 오후가 결국

기억의 조류를 견디지 못해 난파되었어

내 소소한 오늘의 조각들

산호색의 새벽 팥색의 아침 회적색의 오후

분명 옅어지는 붉음이었는데

자궁 속 진홍색의 핏자국은 지울 수 없나 봐

나의 윌슨,

시간의 각질들이 쌓여있는 여기

실패를 숨기기 좋은 진열 앞에서

파랑의 무인도를 상상해

진지한 다짐들이 노랑의 햇살에 녹아내려도 좋은

썩지 않은 외로움들이 도리어 숨은 보물찾기라서 좋을

두리뭉실한 범위의 얄팍한 어디쯤에서

결국 내가 너의 것이지

네가 내 것이 아닌

 

 

 

 

당신을 구하는 문제

 

 

  대괄호를 열면

  당신은 오래된 전축처럼

  먼지 아래 있다

  혼이 없는 당신도 당신이라면

 

  괄호 밖 당신이

  턴테이블에 레코드를 건다

  햇빛 아래 부유하는 먼지들

  가난에 어울리지 않는 선율은

  아름다운 폭설 같다

 

  중괄호를 열고

  나는 나의 기억 순으로

  당신의 시간을 약분하고

  물구나무를 한 당신은

  당신을 나눈다

  재가 될 때까지

  당신으로만 고립될 때까지

 

  슬픔의 꼭대기에선 우는 법이 생각나지 않아요

  선택을 미루는 법을 몰라

  되감기로 웃고 말아요

 

  괄호를 열자 빈 당신이 펼쳐져 있다 당신이 떠나야 완성되는 당신의 푸가 당신만이 들을 수 없는 당신의 응답 슬프게도 먼지만이 당신 위에서 춤을 춘다 햇살 아래 죽음은 아무 일도 아니지 괄호를 닫는다 문제의 반대편에 나만 남는다

 

 

 

                   *김혜연 시집 근처에 살아요(애지, 2023)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