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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임채성 시조집 '메께라'의 시조(10)

by 김창집1 2024. 6. 23.

 

 

북받친밭

 

 

도랑물 해자를 두른 절벽 위 분지에서

훈련 잘된 초병 같은 청미래덩굴을 보네

 

전쟁이 끝났단 소식

아직 듣지 못한 걸까

 

사기그릇 조각들이 풀숲에 몸을 숨기고

사람의 자취마저 땅에 묻힌 산속 빈터

 

무너진 움막 돌담만

옛 한때를 증언하네

 

바람조차 들지 않는 이 깊은 숲에 들어

단 한 번 열매 맺고 말라 죽는 조릿대처럼

 

결연히 목숨과 바꾼

낡삭은 깃발 하나

 

온대성 초목들이 지난 상처 기워가고

선불 맞은 자리마다 초록 도장 찍는 시월

 

봄볕에 몸을 푼 섬이

말문을 트고 있네

 

 


 

영하의 여름

 

 

주인 잃은 초집 몇 채 불에 탄 그날 이후

마을 안길 올레마다 금줄이 내걸렸다

 

까마귀 울음소리가

총소리에 묻혔다

 

돋을볕 등에 지고 군인들이 다녀가면

어스름에 몸을 숨긴 산사람이 찾아왔다

 

밤과 낮 경계를 따라

핏빛 노을이 번졌다

 

추깃물에 젖은 밭은 모른 채 버려둬도

들나물과 고구마가 절로 절로 자라났다

 

굶어도 그 밭엣것을

캐는 이는 없었다

 

한 줄기 바람에도 목덜미가 서늘해져

이름이 불릴 때면 소름이 돋는 날들

 

개들도 눈만 굴리며

입을 굳게 닫았다

 

 


 

조간대

 

 

중산간 마을들은 조간대가 되어 갔다

하루 두 번 어김없이 밀썰물 갈마들 듯

태양의 걸음을 따라 달라지던 발소리

 

노을빛 스러지면 산 그림자 내려왔다

씨감자 한 톨까지 자루에 쓸어 담곤

사내란 사내는 모두 산으로 데려갔다

 

어둑발이 물러서면 불길이 치솟았다

구들을 들어 엎고 마루 밑도 들쑤시며

초집에 성냥을 그어 태우던 밤의 자취

 

이름까지 지워진 채 터만 남은 마을에는

무너진 돌담 위로 억새꽃이 흐드러지고

아련한 파도 소리만 소문처럼 떠돌았다

 

 

                  *임채성 시조집 메께라(고요아침, 2024)에서